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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 스트레인저! 타인에게만 받을 수 있는 따스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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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편집자가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나는 뒤통수를 제대로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그 문장은 즉각 이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나만 사랑하는 사람, 나만 너무 사랑해서 문제인 사람’이라고. 물론 편집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그 문장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증오하고, 후회하고, 벗어나고 싶은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0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외로움’이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나는 병적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어딜 가도 미칠 것처럼 외로웠다. 그 외로움마저 부끄러워서 주기적으로 대인기피증에 걸렸다. 내가 외로워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준만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매순간 ‘맨땅에 헤딩’하며 배우는 시기가 바로 20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외로움. 그건 꼭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길든 짧든 인연을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나만의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정’을 주는 대신, ‘네 친구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대신,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대신, ‘나를 위한 시공간’을 집요하게 가꾸기 시작했다. 뭐든지 혼자 하는 법을 배웠다. 혼자 있는 시간에 별의별 휘황찬란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타인과의 마주침을 회피했다.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을 때마다 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통해 문제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내가 상처받을 때 다른 사람도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 상처만 애지중지 돌보느라 타인의 웃는 얼굴 뒤에 감춰진 상처를 볼 수 없었다.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상처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는 것을, 20대에는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서만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항상 나와 함께 하는 것은 나뿐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는 스스로의 기억력을 과신했다. 너무 많은 기억들을 욕심 사납게 끌어안고 살아서 문제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전제가 무참하게 깨지고 있다. 그 깨달음은 고통이지만, ‘나 자신을 향한 지나친 사랑’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얼마 전에 친구가 물었다.

“넌 왜 하필 PC방에서 밤 새가며 글을 썼냐?”

나는 ‘우리 집이 워낙 시끄러워서’라고 대답했지만,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사실 시끄럽기로 따지면 딸 셋인 우리 집보다 PC방이 훨씬 시끄러웠다. PC방에서 한글파일로 작업하고 있는 사람은 늘 나 혼자였고, 모두들 흥분한 채 밤새 게임을 즐기느라 온갖 고함소리가 난무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PC방이 좋았을까. 나는 글을 쓸 때 느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외로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그 느낌이 싫었던 것이다. ‘세상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싫어서, 안전하게 여러 사람과 함께 밤을 샐 수 있는 PC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첫 책과 두 번째 책은 ‘PC방이 낳은 아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핑계다. 더 솔직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생뚱맞게 PC방에서 밤을 새며 글을 썼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친구 때문이었다. 내가 원고를 쓴답시고 밤을 새고 있으면 친구가 묵묵히 내 옆자리에 와서 함께 있어주는 것이 좋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그 친구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커다란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졸음도 참고, 자기 스케줄도 포기하고, 그저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모두가 온라인게임에 여념 없는 거대한 PC방에서 혼자 우울하게 글을 쓰는 이상한 아이 옆에 말없이 앉아 있어 준 친구 덕분에, 나는 인생에서 가장 아프고 외로운 시기를 꿋꿋이 버틸 수 있었다. 너무 힘들 때는 내가 누군가에게 깊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20대 후반의 내가 그랬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그 흔한 말 한 마디, ‘고맙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


헬로우, 스트레인저!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 풍경 중 하나. 그것은 ‘거리의 예술가들’이다.
바이올린, 첼로, 기타, 심지어 플루트나 오보에까지,
거리의 악사들은 어디서나 ‘광장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여행자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거리의 화가, 거리의 희극배우, 모두가 멋진 거리의 예술가들이지만
저 사진처럼 온몸에 갑갑한 분장을 하고 행인들과 사진을 찍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힘든 거리의 예술가들 아닐까.
그들은 악기나 화폭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낯선 타인들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없다.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생면부지의 타인들을 향해
완전히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행위예술이 아닐까.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인에게 커다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후미진 벤치에 앉아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의 단골 눈물 벤치였는데, 정말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알고 보니 나만의 은신처가 아니었다. 어떤 이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한국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 중인 일본인 선생님이었다. 나는 불에 덴 듯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창피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딱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그녀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그녀는 놀라운 한국어 실력과 함께 놀라운 기억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여울 씨, 왜 그래요? 힘든 일이 있나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다가, 그녀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더 깊은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는 많은 걸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가 자신을 위로할 수는 없더라고요. 위로는 타인만이 할 수 있어요. 물론 내가 여울 씨에게 편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지금 누군가 필요하다면 나에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에게 그날 내가 받은 충격과 슬픔을 모두 말했다. 아무데서도 열릴 것 같지 않던 굳게 닫힌 마음은, 엉뚱하게도 전혀 친분이 없는 낯선 사람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오히려 그녀가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고, 나는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더듬거리며 말했다. 다 털어놓고 나니 거대한 바위산 같았던 그 걱정거리가 냇가의 돌멩이처럼 보잘 것 없어 보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고해의 기쁨’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점찍어 놓은 비밀 장소를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힘든 객지생활을 해온 그녀도 그 순간 펑펑 울 곳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내가 그녀의 비밀 장소를 선점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나처럼 울고 싶은 하루였을지 모른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그녀에게 ‘위로하고 싶은 타인’을 넘어 ‘위로받을 수 있는 타인’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을.


불쑥 편지를 쓰고 싶은 하루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나는 우체통이나 편지함을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설렌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된다.
설령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특히 이 사진처럼 대문에 곧바로 편지를 넣을 수 있는 집들은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대문은 닫혀 있어도 편지를 향한 손길만은 언제든 열어놓고 있다.
외로움은 타인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굳게 닫힌 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자기 집 대문에 조그마한 편지함을 달아놓는 마음으로,
우리도 조금씩 ‘나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늘 ‘마음의 귀’를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 <클로저>에서 내가 열광하는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첫 장면. 앨리스(나탈리 포트만)가 신호등 건너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남자 댄(주드 로)을 향해 활짝 웃어주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깨어나자마자 댄을 바라보며 던지는 대사. “안녕, 낯선 사람!(Hello, Stranger!)”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향해 ‘이미 너는 내 것이야’라고 선전포고하는 듯한, 그녀의 당찬 미소가 어찌나 싱그러웠는지. 두 번째 장면은 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는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이렇게 외치는 장면이다. “내가 너의 낯선 사람이야, 점프해!(I'm your stranger! Jump!)” 낯선 사람을 마치 오랫동안 사랑해온 사람처럼 친밀하게 대하는 앨리스. 그리고 그녀에게서 배운 사랑을 엉뚱하게도 다른 여자에게 베풀어버리는 댄의 엇갈린 사랑.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엇갈림’이 아니라 ‘점프’다. 현대인은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매번 망설인다. 너무 살갑게 다가오는 사람을 향한 경계심도 많다. 하지만 방법은 하나뿐이다. 점프!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자의식을 깨버리고, 내가 있는 힘껏 뛰어올라 너에게로 가는 것뿐이다.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이해받기를 바라기만 하다가는, 결코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없다.

한 시인은 자신을 만든 팔할이 ‘바람’이라 했는데, 나를 만든 팔할은 ‘타인’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의지로만 내 삶을 조각해온 것이 아니다. 수많은 타인과의 만남과 뜻밖의 우정이 만들어낸, 영원히 풀 수 없는 복잡한 인연의 매듭이 바로 나다. 나라는 존재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타인의 보살핌들이 일궈낸 열매라는 것. 나를 빛나게 하는 그 무언가가 정말 있다면, 그것은 이토록 이상한 나를 지켜주고 돌봐주고 받아들여주었던 타인의 사랑과 배려임을. 이제는 겨우 안다. 부끄럽게도, 정말 눈물겹게 고마운 사람들에게는 고마움을 더욱 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고맙다’고 치하하는 것보다도, 내가 받은 사랑을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타인들에게 베푸는 것임을, 이젠 안다.


p.s.다음 주에는 20대의 키워드 16/20, ‘배움’그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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