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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웅에 박근혜와 문재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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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요시키의 대표작 『은하영웅전설』(이하 『은영전』)은 SF판타지 소설로 분류되지만 한 편의 뛰어난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아니 뛰어나다는 표현으로는 다소 부족할 정도로 곳곳에 정치에 관한 통찰이 가득 들어 있다. 이 점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난 18대 대선 이후였다. 나는 개표 방송을 보면서, 이후 나온 갖가지 대선 결과에 대한 분석을 보면서 『은영전』을 떠올렸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됐다.

『은영전』의 기본 구도는 간단하다. 최선의 군주제(은하제국)와 최악의 민주제(자유행성동맹)의 대립. 은하제국은 정치와 군사분야의 천재이자 강력한 개혁정책, 공평무사한 인사정책, 압도적 카리스마로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황제 라인하르트가 통치하는 제국(帝國). 반면 자유행성동맹은 자유를 위해 은하제국을 탈출한 사람들이 기나긴 고난의 행군 끝에 만든 공화정이지만 현재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정치인들은 철저히 무능하고 부패한 상태다. 무기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으며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고 비밀종교와 결탁하여 정치자금을 받고, 흡사 해방정국의 ‘서북청년단’ 같은 우국기사단을 만들어 반대파에 테러위협까지 가한다. 하지만 이 정권, 극중 인물인 욥 트류니히트가 수반인 자유행성동맹 정권은 국민들의 합법적인 투표에 의해 선출된 정부다.


애니메이션 <은하영웅전설>

최악의 민주정이 압도적 국력을 가진 군사천재 라인하르트에 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무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자유행성동맹군 최고 지장(智將) 양 웬리 때문이다. 양 웬리는 자국의 정권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전쟁을 끊임없이 혐오하면서도 은하제국의 침공을 막아낸다. (양 웬리가 처한 상황, 캐릭터 등은 이순신과 매우 유사하다) 적장 라인하르트의 위대함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그와 맞서 싸우는 건 오로지 ‘민주 공화정’이라는 가치를 보존해 후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의 맞대결 이른바 ‘버밀리온 회전’은 결과적으로 무승부로 끝났다. 둘의 군사적 대결에서는 양 웬리가 승리를 목전에 두었지만 라인하르트의 부하들이 자유행성동맹 정부를 굴복시켜 항복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가 타고 있던 전함을 정조준하고 있던 양 웬리는 정부의 항복에 따른 정전 명령에 지체 없이 따른다. 공화국의 군인은 민간 정부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단독회담은 『은영전』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여기서 라인하르트는 양 웬리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하지만 부패하고 무능해 자신에게 무기력하게 항복한 ‘민주공화정’에 다음과 같은 신랄한 독설을 날린다.

“민주공화주의는 인민들의 자유의지로 자신들의 제도며 정신을 타락시키는 체제인가?”

양 웬리는 이 독설에 ‘인민을 해칠 권리는 오로지 인민 자신에게 있다’라는 말로 방어하면서 라인하르트 본인은 위대한 황제지만 후계자가 당신처럼 훌륭하고 뛰어나다라는 보장이 없다고 재반격을 가하지만 라인하르트가 민주공화정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지적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이 독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18대 대선으로 돌아와 보자.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역량을 총결집 해 진검승부를 벌인 이번 대선의 결과는 51.6 대 48 이었다. 48쪽은 당연히 ‘멘붕’에 빠졌고 승리한 쪽은 ‘나라를 지켰다’며 환호했다. 흥미로운 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쪽의 논거 중 하나가, 정확히 말하면 ‘차악’인 문 후보를 그래도 지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일부 사람들의 논거 중 하나가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대놓고 박 후보가 ‘여성 대통령’이 아니라 ‘여왕’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박근혜 당선자는 죽을 때까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는 여왕이 아니라 임기 5년의 단임 대통령이다. 헌법과 법률에 보장된 권한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여왕론’, ‘공화정 보존론’을 이야기하는 쪽은 당선자 혹은 집권 세력의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그런 것일 게다. 이런 점에서 48%에 속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역설적으로 라인하르트의 독설을 깊이 체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의 자유의지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제도며 정신을 타락시켰다”

반대로 문재인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면 박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실패에 책임이 있으며 대북관도 불분명하고 ‘남쪽정부’ 운운한 세력과 총선서 연대를 맺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역시 ‘국민들의 자유의지로 민주공화국의 제도며 정신을 타락’ 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행성동맹의 끈질긴 저항을 물리치고 끝내 우주통일을 이룬 라인하르트는 불과 2년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자신의 후계로는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아닌, 자신만큼 현명하고 능력이 충만한 황후 힐더를 택한다. 만약 자신의 아들보다 정치와 군사면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타난다면 정권을 아들이 아닌 그 사람에게 주라는 유언도 남긴다. 천재 황제의 멋있고 쿨한 마지막 유언이지만 이후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인민들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해칠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18대 대선은 라인하르트의 독설에 ‘그렇지 않다’라고 응답하지 못했다. 상대방의 승리를 이 독설에 끼워 맞추려고 했을 뿐이다. 양 웬리가 ‘백성을 사랑하는 철인(哲人) 황제의 치세’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끝내 지키고자 했던 ‘민주공화정’의 가치는 언제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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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완전판 스페셜 박스세트다나카 요시키 저/미치하라 카츠미 그림/김완 역 | 디앤씨미디어(D&C미디어)
1982년 11월 일본의 도쿠마 쇼텐에서 출간된 『은하영웅전설』은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 다나카 요시키는 이 작품으로 1984년 일본의 SF상인 ‘성운상’을 수상했다. 이후 1991년 우리나라에서 첫 출간된 후 쇄를 거듭하며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은하영웅전설 완전판』에는 국내에 번역된 바 없는 외전소설 『황금의 날개』가 완역되었으며, 작품의 만화화를 맡은 미치하라 카츠미의 컬러, 흑백 삽화가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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