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불평하지만 나는 환경을 믿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일어나서 자기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찾아 나서며,
혹시 원하는 환경을 찾지 못하면 직접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G. 버나드 쇼
성공한 사람들은 일어나서 자기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찾아 나서며,
혹시 원하는 환경을 찾지 못하면 직접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G. 버나드 쇼
“대학이란 마음껏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자유를 배우는 곳이다.”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말이다.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무한한 자유. 무엇이 말이 되는지, 맞는 말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우리 안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제멋대로 물결치게 내버려두는 곳. 내가 잃어버린 대학의 모습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여기서 ‘헛소리’란 그저 이유 없이 내뱉는 무의미한 말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시키는 대로 무작정 과거의 질서를 답습하지 않는 말.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맺힌 절규를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 그저 내 스펙, 내 커리어만 챙기느라 ‘기성세대가 허용하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는 용기. 성공에 ‘필요한 말’이 아니라, 쓸모없어 보이지만 이 척박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은 희망을 잃지 않는 말. 내게 ‘헛소리’란 그렇게 뜨거운 자유의 갈망을 내포한 눈부신 상징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한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교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충격적인 포스터 하나를 발견했다. “돈 버는 비법을 알고 싶으십니까? 주식투자 동아리, ○○○로 오세요. 투자의 귀재들이 최고의 재테크 비결을 알려드립니다.”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눈앞의 이 글귀가 정말 사실일까.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버젓이 잘 운영되고 있는 교내 동아리가 맞았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대학생들이 주식투자를 위한 각종 비법을 배워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이 사회는 과연 젊은이들에게 어떤 비전을 주고 있는가. 대학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헛소리’를 장려하기는커녕 ‘확실히 돈이 되는 소리’가 아니면 점점 발붙이기 힘든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강의도 바로 20대들을 향한 강의다.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조바심이 가득하다. 수업 시간에 떳떳하게 토익 공부를 하기도 하고, 각종 취업시험 준비 때문에 수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는 아이들도 있다. 상대평가제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수를 매겨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왜 내가 A학점이 아닌지’를 문의해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말들’을 들려주고 싶다. ‘뜬구름 잡는 말들의 소중함’을 전달해주고 싶다. 헛소리나 쓴 소리를 싫어하는 아이들의 닫힌 마음이 문득 기적처럼 열리고, 가끔 그들의 눈빛이 반짝거리거나 촉촉해질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눈물겹다. ‘빨리빨리, 앞으로 나아가자’라고만 외치는 세상에서, 나는 ‘빨리만 가느라 우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진심 어린 눈빛을 느낄 때 나는 남모르게 감격한다.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상처를 곱씹으며 역사를 배우는 공간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건물 전체가 ‘유태인들의 거대한 트라우마’로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음껏 아파할 준비를 하고 이곳에 가야 한다.
저절로 말소리가 잦아들고, 조용히 과거의 아픔과 대화하게 되는 곳.
학살당한 유태인들의 수많은 얼굴을 형상화한 해골 모양의 철판을 밟으며,
관람객들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상처가
생생한 현재의 상처로 되살아나는 아픔을 느낀다.
그 불편함이, 그 죄책감이 우리를 비로소 인간답게 만든다.
나는 이곳에서 ‘과거 유태인들만의 상처’가 아니라
아직도 버젓이 이 세상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우리 눈에 미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상처들의 뼈아픈 절규를 듣는다.
내가 정말 ‘공부를 하고 싶다’고 느낀 것은 이제 더 이상 학생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순간이었다. 모든 사회적 의무를 면제받는 아늑한 학생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갑자기 세상 밖으로 추방된 것 같은 공포심이 밀려왔다. 이제 아무도 나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게 된 순간. 어디에도 학생증을 내밀 수 없게 되는 순간. 나는 신기하게도 맹렬한 배움의 열정을 느꼈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저절로 끓어오르는 배움의 열정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다. 어떤 커리큘럼에도 나 자신을 우겨넣을 수 없을 때. 오직 나만의 마음 속 셀프 아카데미를 여는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처음으로 ‘내 마음 속의 배움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누구의 가르침에도 의존할 수 없고, 오직 나의 휘청거리는 감각만을 나침반 삼아 홀로 가야할 때.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성적이나 학위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직업을 얻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 세상과 나의 진짜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배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배움.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절박한 느낌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긴장감을 놓치는 순간,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겨운 노력 끝에 다가온 깨달음의 순간은 멋지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깨달음을 경계해야 한다.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배움의 결과에 안주하기 쉽다. 쉽고 재미있는 책도 경계해야 한다. 쉽게 배운 것은 쉽게 망각된다.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말도 위험하다. 정말 소중한 깨달음은 그렇게 쉽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을 뒤흔드는 배움은 진정 삶을 통째로 던지는 모험을 통해서만 간신히 얻어진다.
나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정말 소중한 배움의 시간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온다.
지식을 흡수하기만 하고 그것을 진정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없다면.
지식은 쉽게 흡수되고 쉽게 휘발되어버리는 ‘정보’에 그치고 만다.
우리에게는 배움을 오랫동안 혼자 곱씹을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사유의 흙탕물들을 가라앉혀 고요히 자기 안으로 침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떠들썩한 교육은 상상력은 부추기면서 관찰력은 길러주지 않는다.
조용히 혼자 생각해보는 시간만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으로 보일지라도.
바로 그 순간, 무한한 창조성이 꿈틀대는 마음의 연금술이 시작된다.
강의나 원고를 청탁받을 때 가장 많이 듣는 주문이 바로 “쉽고 재미있게 해주세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쉽고 재미있지가 않다. 쉽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정말 중요한 내용을 희생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배움은 결코 쉽고 재미있게 얻어지지 않는다. 아픈 다리를 무릅쓰고 걷고 또 걸어 깊은 산속에 들어가야만 맛볼 수 있는 샘물의 맛처럼.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오랫동안 공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연인의 마음처럼. 쉽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던지고, 진심을 다해 열강을 한 날은 반드시 청중의 따스한 반응을 느낀다. 사람들은 쉽고 재미있어야만 듣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단 하나의 실마리라도 있다면 어려움도 잊고 귀찮음도 잊는다. 배움의 엔진은 ‘쓸모 있음’이 아니라 ‘절실함’이다. 그리고 절실하게 배운 것은 어떤 황무지에서도 그 쓸모를 찾아낸다.
오늘날 부모들은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자녀들을 교육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이 즐겁다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강하다. 하지만 더 나은 환경에서 더 즐겁고 재미있게 배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쉽고 재미있고 편안한 것에 중독되면 실제 세상에서 장애물을 만났을 때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장애물에서 ‘귀찮음’만을 볼 뿐 장애물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진실을 볼 수 없게 된다. 아파하고, 어려워하고, 망설이는 능력이야말로 20대에 가장 필요한 배움의 기술이 아닐까. 걸핏하면 ‘힐링’을 외치는 사회에서 우리가 진정 잃어버린 것은 ‘아픔을 아픔답게 아파하는 방법’이 아닐까.
p.s.다음 주에는 20대의 키워드 17/20, ‘정치’, 그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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