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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눈이 그치면 나는 어떤 삶과 결별을 결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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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온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눈사람을 다 만들고 나서 벙어리 털장갑에 붙은 눈을 떼어내고 있으면 장갑 안쪽까지 축축한 기운이 느껴진다. 기껏 공들여 만든 눈사람이 하얗고 보송보송한 것도 잠시뿐, 곧 눈사람의 온몸은 녹은 아맛나 색깔처럼 처량해진다. 겨울철에는 무엇을 하고 놀든 놀이가 끝나면 아득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아득하게 눈이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한 권의 쓸쓸한 그림책이 있고 그 그림책을 그린 한 사람이 있다. 이와사키 치히로.

이와사키 치히로(1918~1974)는 1973년에 『눈 오는 날의 생일』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눈이 오는 날에 태어난 토토는 내일이면 다섯 살이 된다. 남몰래 생일을 손꼽아 기다려왔고 딱 하루 남았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친구의 생일날이어서 그 집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선물이랑 잘 챙겨 들고 놀러간 자리에서 토토는 너무 흥분했는지 엉겁결에 친구의 생일 초를 대신 끄고 만다.

“어라, 어라, 토토가 꺼 버렸어. 남의 초를 불어 버렸어. 자기 생일도 아니면서.”

난감한 상황을 뿌리치고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온 토토는 방 한 구석에 틀어 박혀 있다. 괜찮다고 붙잡는 친구들도, 매달리는 강아지 치치도 다 싫었던 이 창피한 기분을 어쩌면 좋을까. 토토는 가만히 중얼거린다.


“내 생일에는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어.”

그리고 조심스레 덧붙인다.

“별님, 별님, 엄마한테는 내일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정말은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내일 생일날에 새하얀 눈을 꼬옥 내려주세요. 내가 태어난 날처럼요.”(p.21)

이 아이의 머쓱하고 부끄러운 기분을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이 아닌 다른 사람의 그림으로도 이만큼 생생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방 한 구석에 덩그마니 주저앉아서 혼자라도 생일을 기다려보는 토토. 그에게는 지금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유일한 생일 손님으로 초대받은 첫눈은 토토의 바람처럼 꼭 맞게 그 마을에 내려줄까. 만약 토토가 곁에 있다면 생일 따위는 ‘참 바보 같은 날’이며 ‘오늘은 나의 생일인데, 나 이런 기분 정말 싫어. 너희들의 축하에도 이런 기분 정말 싫어.’라는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어제와 다른 것은 없어. 그저 기분이 그래. 그럭저럭 내일이 와 버리면 아무 것도 아냐’라는 뚱하기 짝이 없는 생일 노래를 듣는다면 상심한 토토에게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이와사키 치히로는 작가가 독자에게 느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선과 몇 마디 말만 있으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작가다. 그의 다른 그림책 『아기 오는 날』에는 글이 거의 없고 그림도 간결하지만 작가가 그려낸 토토의 표정에는 갓 태어난 동생이 처음 집에 오는 날 언니가 느끼는 난데없는 기분이 정확히 담겨 있다. 아참, 토토의 생일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알아맞혀 보시길 바란다. 표지에 그려진 빨간 모자와 장갑이 그날의 실마리다.

이 책을 쓰고 그린 이와사키 치히로는 원치 않는 결혼을 했고 남편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 남편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젊은 부부에게 불행이 일어났던 때는 동아시아를 겨냥한 일본의 침략 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무렵이었다. 남편의 죽음 전까지는 평범한 주부로 살던 치히로가 그림책을 그리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참회의 마음이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첫째는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었고 둘째는 전쟁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느끼는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자신이 어느 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과 무수한 전쟁 피해자의 고통과 죽음을 밟은 채 살아있었다는 점이 치히로를 괴롭혔다. 아픈 시대에서는 어느 지점에도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자각한 순간 치히로는 이전의 모든 모호한 삶과 분명한 결별을 다짐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책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책을 통해 긴 침묵에서 벗어나 진실에 귀를 열었고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이와사키 치히로는 반전, 반핵 운동에 앞장섰으며 자신의 조국이 덮어두려 한 전쟁에 관한 왜곡된 사실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치히로 미술관의 수익금 전액은 인권운동을 위해 쓰이고 있다.

올 겨울에는 자주 큰 눈이 내릴 것이라고 한다. 눈이 오는 날은 세상의 얼룩진 발자국이 선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날이다. 신문의 인쇄잉크처럼 줄지어 툭툭 찍힌 검은 발자국은 걷는 사람의 망설임까지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침 이 그림책과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를 펼쳐 들었더니 첫 장에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비 되어 있다.’

진실에 귀 기울이기 위해 조용히 하는 것과 진실을 감추기 위해 입을 다무는 것은 다르다. 침묵의 올바른 사용법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다. 하물며 말하기를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꼭 댄 브라운의 경고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와사키 치히로가 그랬던 것처럼 비겁한 중립의 대열에서 벗어나서 무엇을 해야 할까. 부끄러운 작은 일들 앞에서도 토토처럼 정직해지고 외로움을 무서워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이 눈이 그치면 나는 어떤 삶과 결별을 결심할 것인가.


함께 선물하면 좋은 것

언니네 이발관 1집<비둘기는 하늘의 쥐>
언니네 이발관 | 미디어신나라

이 음반은 현재 품절상태여서 중고음반이 아니면 구할 수 없다. 1996년 11월 11일에 발매되었으며 자생적으로 한국 모던 록의 시대를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2013년 ‘우리가 기억해야 할 100장의 음반’ 목록에 선정되었으나 현재로서는 재발매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다섯 번째 수록곡인 ‘생일기분’은 생일을 우울하게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단골 명곡으로 꾸준히 애창되고 있다. 이 곡을 사랑하지만 음반을 구할 수 없어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를 대신 선물하거나 혹시 라이브로는 들을 수 없을까 애태우면서 연말마다 열리는 언니네 이발관 공연 ‘안녕 2013년의 시간들’을 예매하기도 한다는 후문이다.

『생일 축하해요』
프랭크 애시 글,그림/김서정 역 | 마루벌

고요한 생일 이야기로는 <눈 오는 날의 생일>과 선두를 겨룰 것 같다. 밤하늘에 뜬 달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던 꼬마곰 달곰이가 달에게 생일선물로 모자를 선물하기까지의 고군분투를 담은 이야기이다. 생일을 요란스럽게 지내기는 싫고 들뜬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일날 이 책을 스스로에게 선물해도 좋겠다. 달곰이가 달에게 선물을 주는 과정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큰 생일 선물이 된다. 그만큼 사랑스럽다.


[관련 기사]

-프로포즈를 앞둔 커플에게 - 『토끼의 결혼식』
-엄마, 언제 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에게 - 『루와 린덴 언제나 함께』
-오랫동안 함께 한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이들을 위하여
-간절히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 - 『마지막 휴양지』
-사랑한 사람과 이별한 뒤, 치유와 위로를 위한 그림책 - 『아모스와 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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