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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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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수학여행이라면 나 역시 세 번의 경험이 있다. 그 세 번 모두 나는 간절히 기다렸다. 당시에는 미성년자가 타지를 여행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아 기다린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초등학교 시절이 가장 길었다. 5학년쯤 되니까 교실이며 교정 곳곳이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소원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6학년이 되어 선배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학교를 다니는 것. 그리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자면 수학여행을 다녀와야 했다. 내게 초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이란 그런 의미였다.


우리 지역에서는 대개 경주에서 1박하고 부산을 둘러본 뒤 경부선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일정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1박하고 돌아온 형과 누나의 손에는 이국적이라기보다 타지적인 물건이 들려 있었다. 예컨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초록색 야광 불상이라든가, 화환처럼 만든 조개껍데기 목걸이 같은 것이었다.

 

당시 우리의 놀이터는 방과후의 골목이었는데, 미취학 아동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서로 뒤섞여 놀았다. 형제와 자매가 서로 얽혀 있으니 성별이나 나이를 가려가며 놀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다녀온 형, 누나는 그런 우리를 시큰둥하게 쳐다보곤 했다. 마치 경주와 부산에 가면, 야광 불상이나 조개껍질 목걸이 같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 있다는 듯이.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방과후의 골목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징어 잡기나 자치기를 할 때면 5학년이 가장 연장자가 되어 놀이를 이끌었다.


그러니 6학년이 되어서도 수학여행을 떠나기만 간절히 기다릴 수밖에. 나는 떠나기 전 날, 가게에 가서 초코파이와 사이다를 샀다. 삶은 달걀과 사과는 어머니가 따로 챙겨줬다. 어머니는 내게 꼭 필요할 때 쓰라고 돈을 주셨는데,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두면 돈을 잃어버린다며 팬티에 직접 바느질을 해 작은 주머니를 만드셨다. 그렇게 많은 돈을 몸에 지니는 건 난생 처음인지라 어머니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수학여행 당일, 완행열차를 통째로 대절했기 때문에 기차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남자애들은 짐칸에 올라가서 드러누웠고, 출발하자마자 우리는 싸가지고 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경주에서 뭘 봤는지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석굴암만은 생각난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시절에는 오늘날 유리로 막아놓은 석굴암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별 감흥은 못 느꼈을 것이다. 친구들과 줄지어 들어가기 때문에 장난만 치다가 나왔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석굴암이라면 수학여행에서 본 기억이 제일 먼저다.


수학여행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쨌든 가봤다는 것.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봤다는 것. 적어도 수학여행을 가기 전의 나보다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 됐다는 것. 지칠 때까지 천마총으로, 안압지로, 불국사로 돌아다니다가 돌아온 저녁에 나는 속옷 주머니에 넣어둔 돈을 꺼내 낯선 지방의 여관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사 먹었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서 기념품이라도 사볼 요량으로 기념품점에 들어갔더니 예의 그 작은 야광 불상과 작은 석가탑, 다보탑 등이 있었다. 그간 우리가 익히 보던 것들. 뭐 색다른 게 없을까 싶어서 아무리 둘러봐도 그 뿐이었다. 여관에 딸린 기념품 가게는 초라했다. 신기해서 산다기보다 수학여행지니까 산다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할 그런 것들. 그렇게 사온 선물을 동네 아이들에게 시큰둥하게 나눠주던 형과 누나의 표정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체로 쓰는 여관방의 잠자리는 불편했고, 그나마 아이들이 늦도록 깨어 있는 통에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수학여행은 계속됐다. 우리는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더 내려갔다. 그때 나는 바다를 처음 봤다. 경주의 석굴암이나 부산의 유엔 묘지는 보고도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도 소나무 너머로 바다를 본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골목 안 일상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수학여행의 목적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그 사고가 수학여행 때문에 벌어지기라도 한 듯 양 모든 수학여행이 취소됐다. 대체 수학여행이 무슨 잘못일까. 낡은 배가 기울 정도로 화물을 실은 선사가 문제지. 또 그렇다 한들, 폭격으로 순식간에 침몰한 것도 아닌데, 인명을 구조하라고 만든 국가기관에서 승객을 구하면 되지 않았나. 여하튼 수학여행은 무죄니, 선사와 국가가 책임지기를. 수학여행의 목적은 꼭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론리플래닛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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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ly planet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 6월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일정이나 비행기 탑승 시간 등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 혼자만 현지에 남는 경우가 생긴다. 이미 오랜 외유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 터라 귀국한다는 마음으로 들뜬 사람을 혼자 배웅하는 기분은 썩 좋을 리 없다. 혹시 현지인에게 박대라도 받는다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다 찢어질 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울 마음이 가득한,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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