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면 서로 얼굴을 모르는 관객들과 난데없는 친밀감을 느낄 때가 있다. 얼마 전 배종옥, 정웅인 주연의 <그와 그녀의 목요일>을 관람할 때도 그랬다. 20년이 넘도록 지독하게 엇갈리기만 했던 사랑. 한쪽이 고백하려 하면 한쪽이 도망치고, 한쪽이 마음을 열면 한쪽이 딴청을 피우고. 여주인공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두 사람의 이룰 수 없는 사랑. 평생 변함없이 사랑해온 사람이 그토록 가까이 있는데, 왜 한 번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없었을까. 연극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는데, 코를 훌쩍이는 소리들이 왠지 정겹게 느껴져서, 웃으면서 울었다.
그 순간 조명이 꺼졌다. 갑작스러운 어둠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마지막 장면을 준비하기 위한 스탭들의 바쁜 움직임이 어둠 속으로 느껴졌다. 조명이 꺼지자 사람들은 더욱 마음 놓고 울었다.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더욱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이 연극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관객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마음 놓고 울 시간’을 선물하다니. 어쩌면 우리는 아름다운 작품을 핑계로 펑펑 울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꼭 흘려야 할 곳에서 흘리지 못한 눈물을 뒤늦게라도 세상 밖으로 방류하기 위해서. 그날 함께 그 연극을 본 사람들은 서로를 전혀 모르지만, 그 순간 작고 아늑한 눈물의 공동체에 동참하면서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인이 되었다.
순간이 영원으로 폭발하는 순간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어떤 순간이 곧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베르메르는 그런 일상 속의 기적을 포착하는 데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것 같다.
진주목걸이를 하고 거울을 보는 순간,
아침식사를 위해 우유를 따르는 순간,
햇살을 등불 삼아 편지를 읽는 순간.
베르메르는 그런 평범한 일상의 시간들 속에서
순간이 영원으로 폭발하는 듯한 눈부신 장면들을 포착해낸다.
예술의 기적은, 이렇듯 우리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시공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예술이 허락되지 않은 곳에서 뜻밖의 예술이 시작된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조촐한 바이올린 독주곡이 가슴을 울릴 때도 있다. 내가 자주 두통약을 사러 가던 동네약국의 약사님이 약국에서 홀로 플루트를 연주하는 장면을 본 적도 있다. 그 순간 매일 지나치던 그 평범한 약국이 정말 멋진 실내악 콘서트홀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의 주인공 콰지모도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다고 생각한다. 콰지모도는 심한 꼽추였고 다리까지 절었으며 애꾸눈에 귀까지 멀었다. 그에게는 자기표현의 통로가 전혀 없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를 표현하는 존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기괴한 외모를 본 순간 모두들 고함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그를 놀림거리로 만들고 웃어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트르담 대성당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오직 콰지모도만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의 청중이었다. 콰지모도가 온몸의 체중을 실어 종소리를 낼 때마다 사람들은 단지 ‘시간을 알리는 정보’가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음악’의 감동을 느낀다. 그가 온몸으로 ‘청동괴물(노트르담의 종)’을 껴안고 종소리를 내는 순간. 그 순간 그의 입술은 대장간의 풀무처럼 생동감 넘치는 고함을 지르고,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꽃이 되며, 청동으로 만들어진 종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성악가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다. 그럴 때면 그는 ‘노틀담의 꼽추’가 아니라, “하나의 꿈, 하나의 소용돌이, 하나의 폭풍”이 된다. 노틀담의 종소리는 콰지모도가 지휘하는 음악이며, 노틀담 대성당은 그 자체로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된다. 그 순간 콰지모도의 아름다운 종소리는 예술의 기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저잣거리를 아름다운 콘서트홀로 바꿔버린다.
거리의 악사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단지 우리의 바쁨, 무신경함이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수없이 놓칠 뿐이다.
음악은 공간의 깊이와 질감을 바꾼다.
음악으로 인해 상투적인 공간은 특별한 장소로 바뀐다.
인적 드문 골목길, 어수선한 지하철역, 모두가 바삐 걸음을 옮기는 대로변.
이 모든 평범한 장소들이 순식간에 아늑한 ‘울림통’이 된다.
‘이 상품을 꼭 사주세요!’라고 외치는 호객소리가 아닌,
‘그저 아무 목적 없이 이 소리를 들어주세요’라고 속삭이는 음악소리.
음악은 삶으로부터 잠시 비껴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선물한다.
현대인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늘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은 힘들고 괴로운 순간들이다. 우리의 살아있음을 우리의 ‘일’로만 증명 받는다면 삶은 얼마나 쓸쓸하고 삭막한가. 다 큰 어른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들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렇게나 해도’ 그 존재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이어서 사랑스럽고, 귀엽고, 존엄하다. 아이들은 아무리 실수해도, 조금 모자라도, 매일 말썽을 피워도, 아이들이기에 어여쁘다. 어른들에게도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하고 명예롭고 복된 느낌. 예술은 바로 그런 느낌을 선사한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귀를 가진 내 운명에 감사하고, 멋진 그림을 볼 때 눈을 가진 내 운명에 감사한다. 예술은 그렇게 ‘당연하게 여겼던 그 무엇’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배우게 만든다.
얼마 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백조의 호수> 공연을 봤다. 발레리나의 몸짓에 담긴 세세한 의미는 모르지만, 발레의 아름다움을 <빌리 엘리어트>나 <블랙 스완> 등을 통해 살짝 엿본 게 전부지만,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떤 낯선 감동에 울컥해졌다. 모두가 ‘브라보’를 외치며 웃고 박수를 치는데, 나 혼자 생뚱맞게 울고 있었다. 단지 공연에 대한 감동을 넘어서, ‘왜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이제야 보고 있을까’하는, 내 자신의 삶을 향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나의 바로 앞자리에서 올망졸망 모여앉아 발레 공연을 보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그저 부러웠다. ‘조금만 마음을 열면’ 모두에게 열려 있는 음악과 달리, 발레는 ‘너무 머나먼 예술’이었다. 발레에 대한 그런 계급적 편견 때문에 나는 발레를 좋아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마음을 열면! 그것이 열쇠다. 그 ‘조금’이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첫 발자국을 떼면, 놀라운 감동의 세계가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다. 예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술은 일단 우리 자신을 바꾼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뜨거운 감동이 모여 바꾸는 공간의 풍경이, 우리의 삶을 조금씩 바꿀 수 있지 않을까.
p.s.다음 주에는 20대의 키워드 20/20, ‘질문’그 첫 번째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정여울의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칼럼은 스마트폰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스마트폰 기종에 맞는 ‘카드뷰어’ 앱을 설치하신 후 ‘카드채널’에서 다운받아 보세요.
* 구글플레이나 앱스토어에서 ‘카드뷰어’로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