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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그러진 곰과 햄터의 데굴데굴 유쾌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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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그러졌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위로를 주는 삐뚤빼뚤하지만 다정한 곰! 망그러진 곰이 2탄으로 돌아왔다. 40만 인간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털 찐’ 귀여운 외모 덕도 있지만,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해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망그러졌어도 나는 나인 걸~” 하고 외치는 망그러진 곰은 사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망그러진 곰은 항상 손에 힘을 빼고 그려서인지, 그릴 때마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이 든다”며, 독자분들도 만화를 읽을 때 이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작가 유랑에게 『망그러진 만화 2』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생생한 답변을 듣기 위해, 특별히 ‘망그러진 곰’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망그러진 만화2』가 출간되었어요(짝짝짝). ‘망그러진 곰(이하 망곰)’과 ‘망그러진 햄터(햄터)’의 소감이 듣고 싶어요.

망곰: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두 권이나 나왔다니 신기해.

햄터: 신기해~

망곰: 인간 세상에는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을 텐데도 우리의 이야기를 즐겁게 봐줘서 고마워. 

햄터: 고마워~

망곰이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또 이름은 왜 ‘망그러진 곰’이 되었는지 궁금해요!

안 그래도 부모님께 나는 왜 다른 곰들과 다르게 생겼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글쎄 내가 사실은 곰이 아니라 감자라는 거야! 내가 감자라니. 굉장히 충격이었지. 그런데 사실은 부모님이 장난친 거였어…!

나는 곰이 맞지만, 아마 다른 곰들과는 다르게 꼬질꼬질 망그러진 외형을 가지고 있어서 ‘망그러진 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 같아.


망곰이와 햄터의 <첫 만남> 에피소드를 인상 깊게 봤어요. 두 친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너무나도 가슴 따뜻한 이야기더라고요. 망곰이는 어떤 곰인지, 망곰이가 직접 자신과 햄터를 소개해 준다면요? 

안녕? 나는 망그러진 곰이야. 한국의 울창숲 곰돌시 망글로 3번지에서 살고 있어(깊숙한 숲속에 살고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오기는 쉽지 않을 거야).

나의 매력 포인트를 소개하자면 용맹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 아주 카리스마 넘쳐 보이지. 외형은 다른 곰들보다 삐뚤빼뚤 찌그러져서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존재가 어디 있겠어? 노랗고 복슬한 털, 짧고 통통한 팔다리.. 이대로의 내 모습을 항상 사랑하고 있어!

햄터는 내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하얀 햄스터 친구야. 정말 작아서 가끔은 밟을까 봐 걱정되기도 해. 하지만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아주 용감하고 대담한 친구거든. 솔직한 성격으로 가끔 나를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친구들을 아끼는 귀여운 햄스터야.

혹시 주변 친구들에게 엄청 인기 많은 거 실감 나요? 인기 비결이 궁금해요!

내가 인기가 있다구? 잘 모르겠는데…. 내가 사는 곰돌시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어. 근데 괜찮아. 멋쟁이 곰은 인기 따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리고 친구와 가족들은 날 좋아해 주니까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굳이 내가 인기가 많은 이유를 꼽자면, 귀여워서는 절대 아닐 테고…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나의 모습이 멋있기 때문이겠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이에요! 망곰이는 털 찐(?) 곰이라 추위를 타지 않나요? 겨울잠을 자지는 않는지도 궁금해요. 망곰이의 겨울나기 비법이 알려주세요~ 망그러진 식구들의 신년 계획도요.

맞아. 북슬북슬한 곰 털은 내 자랑거리 중 하나야. 두터운 털 덕분에 추위를 별로 안 타거든. 햄터가 나의 털을 엄청 부러워하고 좋아해. 부드럽고 따뜻해서 누워있으면 잠이 잘 온다나… 그래서 가끔 내 배 위에서 햄스터 친구들이 잠을 자고 가기도 해. 친구들도 나중에 내가 사는 곰돌시에 놀러 오면 재워 줄게. 



겨울에는 따뜻한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면서 만화책 보는게 최고 아니겠어? 그리고 맛있는 거 많이 먹기! 겨울 살을 많이 찌워 놔야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구..

겨울잠도 자긴 하지만… 봄 잠, 여름 잠, 가을 잠도 자. 내가 잠이 좀 많아..

올해는 친구들과 좀 더 많이 소통하고 싶어. 나 인터넷에 글 올리려고 타자 연습도 열심히 하고 있다. 가끔 오타가 나기도 하고, 맞춤법이 틀릴 수도 있지만 이해해 줘~! 

망곰이도 꿈꾸는 곰생(?)이 있나요? 첫 아르바이트 후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을 느낀 것 같던데,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

내 돈으로 떡볶이를 맘대로 사 먹을 수 있고, 멋진 옷도 사 입고, 친구와 부모님한테 가끔 맛있는 걸 사주고, 좋은 거 선물할 수 있는 어른! 상상만 해도 멋있어.  

『망그러진 만화2』는 전편을 향한 독자 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으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망그러져도 무한한 애정을 보내주시는 독자 분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친구들을 알고부터 나의 곰생이 바뀌었어! 세상살이가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유할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더라고. 친구들도 인간 세상에서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찾아와 줘. 앞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랑 소식들 많이 가져 올게. 항상 함께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유랑

이모티콘도 그리고, 만화도 그리고, 그리고 싶은 걸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그리며 사는 작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캐릭터 ‘망그러진 곰’, ‘망그러진 햄터’로 다양한 콘텐츠와 굿즈를 만들고 있다.

@yurang_official


망그러진 만화 2
망그러진 만화 2
유랑 저
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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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미들마치』, 범사의 비범함 - 유상훈 민음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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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은 공감을 확대하고, 개인적 운명의 경계를 넘어 경험을 증폭하며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대한다.” _조지 엘리엇

내 앞에 책이 놓여 있다. 그 분량은 무려 1400쪽에 이른다. 마치 독자의 접근을 단호히 거부하는 듯한, 일종의 두려움마저 자아내는 이 엄청난 두께의 책은, 바로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만 도통 읽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토록 장대한 책에 이르는 길은 그 자체로 도전이고 모험이다. 나 역시 『미들마치』를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이같이 기나긴 소설은 쓴 작가와 그것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와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낸 편집자, 이들 모두에게 적잖은 경외심을 느꼈다. 요컨대 『미들마치』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조지 엘리엇,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작가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메리 앤 에번스이고, 굳이 남성 이름을 필명으로 내세운 경위 속에 작가의 모든 고난과 빅토리아 시대의 풍조와 그 밖의 여러 복잡다단한 사정이 다 담겨 있다. 일단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듯이, 조지 엘리엇이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했던 당시에는 ‘여성’으로서 작가 생활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수난의 역사를, 엘리엇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브론테 자매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 전의 제인 오스틴도, 그 후의 버지니아 울프도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령 운 좋게 작가가 되었다 하더라도, 여성 ‘작가’라면 더 잔인하고 모욕적인 시련, 즉 ‘여성’ 작가라는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 엘리엇이 쓴, 어쩌면 가장 자조적인 글이라 할 수 있는 「여성 작가들의 어리석은 소설들(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이라는 비평만 보더라도, 그 스스로 무엇을 가장 경계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야심 찬 작가는, 결국 자신이 도모한 것 이상으로 해냈다. 요즘은 물론이거니와, 엘리엇이 살던 시대에도 소설은 이미 넘쳐 나고 있었다. 수천 가지의 이야기들이 세월 속에 잊히고 마모돼 가는 와중에도, 그의 작품은 남았다. 심지어 문학사에 한 획(“영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을 긋는, 결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위업을 이뤄낸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읽히고 있으니, 더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터다. 나는 이처럼 소름 끼칠 만큼 대단한 작품을 펼쳐 들면서,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놀랐다. ‘이게 이 소설의 전부인가?’ 한가득 넘쳐흐르는 찬사들, 압도적인 규모, 걸출한 작가의 대표작! 소설 제목에 붙은 ‘지방 생활의 고찰’이라는 부제부터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솔직히 토로하건대) 이토록 기대를 배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악명 높은 빅토리아 시대, 이미 예고돼 있듯이, 영국의 한 지방 도시(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미들마치)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가치관을 지닌 여성과 남성들—도러시아, 터시어스, 에드워드, 메리, 프레드 등 숱한 개성적인 인물들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한데 얽히고 설키며 자신들의 삶을 조형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일찍이 케이트 밀렛이 평했듯, “조지 엘리엇은 혁명적이지만, 『미들마치』의 인물들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라는 말이 얼마큼 납득될 정도로 이 장엄한 소설은 지극히 통속적인 피날레, 즉 결혼을 향해 내달린다. 

이게 이 소설의 전부인가? 겉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지거나 더러 경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처럼, 문학 역시 함부로 비약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이 작품의 ‘가치’를 제발 알아 달라고 거창하게 호소하고 싶진 않다.(나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 속으로 뛰어들기에 적당한 자리를 한 군데 알고 있다. 독서에 왕도는 없지만, 우리는 가끔 힘들여 읽어야 한다. 예컨대 『미들마치』의 경이로움은, 새로운 시대의 맹아를 한없이 평범하고 안온하고 별스럽지 않은 인물과 사건 속에 심어 놓았다는 데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시대에 붙들린 채 살아가는 지난날의 사람들을 쉽게 비웃곤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지극히 보수적인 결말(결혼)로 치닫는 『미들마치』역시 고루하게 여겨질 수 있다. 거듭 말하건대,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지금 시대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을 초월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그 벽을 넘어서려는 무모한 시도 끝에, 작디작은 물꼬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미들마치』는 19세기 영국의 지방 도시를 병풍처럼 그려 내면서, 다채로운 인물들의 삶을 결혼으로 엮어 낸다. 이것은 이 작품의 표피이다. 하지만 그 심연에 자리한 온갖 결심과 선택과 고뇌와 회한 등은, 마치 현대를 선취한 듯 독자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1400쪽에 이르는 기나긴 이야기는 결말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닌, 장차 도래할 혁신적 인간상을 제시하는 매혹적인 선언에 가깝다. 미지의 영역으로 한 걸음 차분히 나아가는 층계참에 서 있는 조지 엘리엇과 『미들마치』는, 오늘날 독자에게 쉼 없이 더 나은 가능성을 찾아 나서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위대한 소설은 으레 읽는 이(더불어 작가 자신과 번역자와 편집자)를 고달프게 하는 법이다. 이 긴긴 여정을 완주하고 나면,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렸을 때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그사이 우리 사유에 든든한 근육이 새로 붙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필자 | 유상훈 편집자

민음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아니 에르노, 욘 포세 등의 작품을 편집했다.                              


미들마치 1
미들마치 1
조지 엘리엇 저 | 이미애 역
민음사
미들마치 2
미들마치 2
조지 엘리엇 저 | 이미애 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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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STORY] 청다색(靑茶色)의 울림, 윤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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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의 새로운 아트 커뮤니티 ARTiPIO가 들려주는 ART STORY.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아티피오 사이트 바로가기


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이자 최근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작가로 지속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윤형근.

메가 갤러리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와 함께 현대미술 메카인 뉴욕, 유럽 예술의 중심 파리를 점령해 그 입지를 증명했죠. 뉴욕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는 본점인 뉴욕에서 1970~80년대 작품을 소개하며 선보인 2017년의 첫 전시를 시작으로 2020년 2번째 개인전을 개최했고, 2023년 1월에는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넘어가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 지점에서 3번째 개인전을 선보이며 윤형근을 소개합니다.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 지점 윤형근 개인전 설치 전경. January 7 – February 23, 2023. © Yun Seong-ryeol. Courtesy of David Zwirner and PKM Gallery.


파리 전시 오픈 당일에는 무려 1,000여 명이 방문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요. 유럽에서 선보인 윤형근의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프랑스 파리뿐 아니라, 이탈리아 베니스에서도 그의 작품은 빛났는데요. 2018년 MMCA(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되어 성황리에 마쳤던 회고전<윤형근>이 2019년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열린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죠. 회고전 <윤형근>은 베니스의 시립 미술관인 포르투니 미술관(Fortuny Museum)을 가득 채우며 2019년 5월 11일부터 11월 24까지 진행되었는데요.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포르투니미술관에서 열린 윤형근 회고전 전경. ©Laziz Hamani


해당 전시는 세계적인 미술 전문지인 <프리즈(Frieze)>,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비엔날레 외부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로 주목받는 영광을 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방문했던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호평을 쏟아내기도 했죠.

이탈리아의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에서는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영향력 있는 미술인이자, 이탈리아의 원로 평론가 프란체스코 보나미(Francesco Bonami)가 윤형근을 주목하며 리뷰를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답니다.


윤형근, Burnt Umber, 1980 © Yun Seong-ryeol. Courtesy of David Zwirner and PKM Gallery.


윤형근의 작품을 살펴보면 ‘오묘한 검은색’을 풍기며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듯,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오랜 시간 세파를 견뎌낸 고목(古木)과도 닮아 있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흙의 정취를 전하는 듯한 그의 작품은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편안함을 전해옵니다.

이처럼 수수하고 겸손한 ‘미덕’을 추구하는 한국 전통 미학현대적 회화 언어로 풀어낸 윤형근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989년 서울 서교동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앉아 있는 윤형근 작가의 생전 모습 © David Zwirner


윤형근의 대표 시리즈인 <천지문(天地門)>동양의 미를 담고 있어 작고한 이후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의 서화에 근간을 두고 화풍을 정립한 그의 작업은 작위적인 모습 없이 기교가 배제되어, 고매한 인격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 여겼던 옛 선비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BLUE는 하늘이요, 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구도(構圖)는 문(問)이다.”

- 윤형근 -


<천지문> 시리즈를 설명할 때는 ‘청다색 (靑茶色)’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작가는 극도의 단순함을 위해 하늘을 뜻하는 ‘청색(Ultra-marine)’과 흙의 빛깔인 ‘다색(Umber)’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청다색을 통해 린넨, 캔버스, 한지 위에 자연스럽게 스미고 배어 나오도록 연출합니다.

이로 인해 청다색으로 세워 올린 천지문(天地門) 기둥은 마치 먹을 연상시키는 동양적인 정신과 색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을 받고 있죠.


1981년 프랑스 파리의 윤형근 화백 작업실 © Yun Seong-ryeol. Courtesy of PKM Gallery.


2023년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된 개인전은 보다 그 의미가 깊습니다.

윤형근은 일제강점기부터 굵직하고도 치열한 정치·사회 변혁기를 몸소 겪으며 파생된 고민을 작품에 녹여냈는데요. 당시 한국 군부 정치에 대한 분노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화업을 이루고자 체류했던 파리에서 제작된 작품을 중점적으로 전시했습니다.

전시된 25점의 작품은 대부분 첫 공개가 되어 1979년부터 1984년까지의 체류 기간동안 윤형근 작업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 그림이 1973년부터 확 달라졌다.

서대문 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고,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고, 그림에 살아온 것이 배인 것이다."

- 윤형근 일기 중에서 –


그의 작품은 동양화에서 쓰이는 *발묵 *선염 효과를 활용해 한국적인 회화 기법을 선보입니다. 이렇듯 윤형근만의 고유한 방식과 작품세계를 관철시키고 있으나, 시기에 따라 미묘한 특징이 보입니다. 특히 쉽게 접하기 어려운 70년대 후반부터 80년 초반까지의 작품은 더욱 소중한데요.

특히 윤형근의 파리 체류 시기는 그가 다룬 소재 중, 특히 ‘한지(韓紙)’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특히 한지 작업에 보다 주력했기에 다른 작품들보다도 ‘번짐’을 눈여겨볼 수 있는데요. 이는 장인이자, 예술적 스승이었던 김환기의 한지 작품에서안료가 한지에 스미고 번지는 부분에서 영감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던 당시 상황 속에서 벗어나 제작된 작품들은 전 세계 관람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발묵 : 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산수화법
*선염 : 원단(캔버스)을 만들기 전에 원사(실)를 염색해서 제작하는 방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Yun Hyong-keun. Burnt Umber & Ultramarine, 1981-1984. Oil on linen, 91.8 x 115.2 cm. Courtesy of Yun Seong-ryeol & PKM Gallery.


Yun Hyong-keun.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99, Oil on linen, 227.5 x 181.6 cm. Courtesy of PKM Gallery.


이후 1980년대에는 체류한 이후 프랑스 미술계에서 나름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색의 사용이 보다 투명해지고 현대적인 시도가 가미됩니다. 특히 그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국민들의 희생에 대한 착잡함을 작품에 풀어냅니다. 점차 여백이 사라지고 점차 간결해지죠. 작품에 묻어난 간결함과 절제된 선, 면들은 마치 무언의 침묵과도 같이 그 무게와묵직함이 전해집니다.

1990년대의 작품은 보다 순도 높은 검은색을 주로 사용하며, 미묘한 농담 차도 잘 보이지 않고, 오일의 비율이 줄어들며 건조한 화면으로 구성합니다. 이는 되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오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Yun Hyong-keun Portrait, 1980 ⓒYun Seong-ryeol. Courtesy of PKM Gallery


이후 1973년 이후부터의 작업은 큰 변화 없이 전개되지만, 캔버스 위 묵직하게 올리는 붓터치는 각기 다른 모습을 띕니다. 물감과 오일의 비율, 천의 컬러감, 면직 직조 두께, 건조 시간등 모든 면에서 매일같이 변화합니다. 더불어 시대별 작품마다 당시 시대 배경의 아픔에서 비롯된 작가만의 의지와 감정을 엿볼 수 있죠.

이처럼 윤형근은 타계했을지라도 그의 작품은 당시 작가의 감정을 고이 간직한 채, 전 세계 곳곳에서 묵묵히 숭고한 울림을 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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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숨은 두 날개 – 우기와 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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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니_(여자)아이들 미니 4집 <I burn> 티저 사진


케이팝에서 직접 곡을 쓰고 프로듀싱을 하는 아이돌을 찾는 건 이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남이 만든 노래에 입만 벙긋대는 꼭두각시 취급받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사이 참 많은 게 변했다. 곡을 쓰는 아이돌이 등장한 초기는 빅뱅의 지드래곤이나 블락비의 지코처럼 힙합을 기반으로 한 그룹이 유행을 주도했다. 시간이 지나며 음악의 폭도 창작 양상도 넓어졌다. 단순히 ‘곡을 쓴다’라는 사실만으로 주목받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제는 장르, 활동 반경, 창작 방식과 종합적인 스타일 등 창작의 모든 면에서 자기 색깔이 중요해졌다. 여전히 강세인 힙합을 중심으로 팝, R&B, 록,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음악 안에 녹여내는 이들이 많다.

(여자)아이들의 리더 소연은 그런 변화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다. 2018년 데뷔 이후 아이들 앞에 붙어 온 ‘독보적’이라는 수식어는 전소연의 뚜렷한 존재감에 적잖이 기대고 있었다. 소연이 작사와 작곡을 담당한 데뷔곡 ‘LATATA.’와 앨범 제목 <I am>이 전한 폭발적인 카리스마는 이후 아이들의 사운드와 이미지가 자랑하는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기조는 데뷔 3개월 만에 발표한 신곡 ‘한(一)’과 <I made>, <I trust>, <I burn> 등 일명 ‘나(I)’ 시리즈 연작으로 이어졌고, 불과 피와 꽃을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전에 없던 여성 그룹을 탄생시켰다. 데뷔 만 4년을 넘어선 이들은 다섯 번째 EP <I love>와 <I feel>로 거듭 정상을 밟았다. 각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던 ‘Nxde’와 ‘퀸카(Queencard)’는 4세대 아이돌 붐 속에서 음원 차트를 통해 가장 빛난 노래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 영광의 트로피 아래, 멤버 우기와 민니가 있다.


우기_(여자)아이들 정규 1집 <I NEVER DIE> 티저 사진


아이들의 음악을 타이틀곡만 들은 사람 가운데 전소연 외에 곡을 쓰고 프로듀싱을 하는 또 다른 멤버가 있다는 건 생소한 일일 것이다. 소연이 지금까지 활동한 타이틀곡을 전부 썼고, 데뷔 당시부터 팀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정식 데뷔 전 다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연을 통해 만든 높은 인지도도 한몫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여자)아이들에는 소연 외에도 곡을 쓰는 두 멤버 우기와 민니가 있다. 심지어 비중도 작지 않다. 지난 1월 29일 발표한 아이들의 두 번째 정규 앨범 <2>에는 총 여덟 곡의 수록곡 가운데 우기(‘Doll, ‘Rollie’)와 민니(‘Vision’, ‘7Days’)가 각각 두 곡씩, 앨범의 절반을 채웠다. 2022년 3월 발표한 첫 정규 앨범 <NEVER DIE>에도 두 곡씩을 담았다. 앨범 전체를 기준으로 하자면, 소연 못지않은 존재감이었다.

특히 두 사람이 무척이나 개성 강한 창작자라는 점에 주목한다. 앨범 <2> 발매 후 출연한 라디오에서 공동 작업에 관한 질문에 ‘서로 스타일이 너무 달라 같이 곡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대답을 할 정도다. 우선 우기의 경우, 가장 큰 강점은 강렬한 록 사운드를 적극 활용한 묵직한 댄스 팝이다.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특유의 곡 스타일은 2021년 발표한 첫 솔로곡 ‘Giant’만 들어봐도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트렌디 한 팝 펑크와도 거리를 둔 우기만의 록킹한 팝 감각은 ‘LIAR’ (<I NEVER DIE>), ‘All Night’ (<I feel>) 등의 수록곡을 통해 한층 빛났다.

민니는 아이들 특유의 오싹한 한기(寒氣)가 전부 민니 몫이었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하는 곡을 만든다. 두 번째 EP <I made>에 수록한 ‘Blow Your Mind’을 시작으로 창작에 박차를 가한 민니 특유의 서늘함이 깃든 음악은 네 번째 EP <I burn>을 통해 쐐기를 박았다. ‘한(寒)’과 ‘화(火花)’로 온통 절절 끓는 앨범을 적당히 식혀준 건 차가운 체온을 가진 민니의 곡 ‘MOON’과 ‘DAHLIA’였다. 총 여섯 곡이 실린 앨범에서 3번 트랙으로 한 번, 마지막 곡으로 한 번 열기를 눌러주는 민니의 노래들은 마치 냉혈동물처럼 앨범 전반을 감싸며 균형을 잡아주었다. 생각해 보면 멤버 가운데 절반 이상이 작곡 및 프로듀서로 전면에 나서 활동하는 여성 그룹은 <REBOOT>, <WHY SO LONLEY>로 활동 후반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원더걸스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기대한다’거나 ‘응원한다’는 말에 앞서, 우기와 민니가 이미 먼 곳에서 힘차게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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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아웃] 호빵, 호두과자, 붕어빵, 양갱, 시루떡, 그리고 임진아 (G. 임진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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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팥에 대한 취향이 무궁무진하게 까다로워져만 간다. 살면 살수록 좁아지고 또렷해지는 취향의 길이 있다면 나에게는 팥이 그렇지 않을까. 나는 많고 많은 갈래 중에서도 팥길의 여정을 나누고 싶다. 이 책은 내 인생에서 팥이 등장하는 흐름으로 훑어본 포슬포슬한 추억 모음집이자, 입에서부터 마음까지의 취향이 담긴 이야깃주머니이자, 좋아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부분만 쏙 골라 입에 가져가는 이가 전하는 행복 안내서이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컴퓨터 작업용 클라우드에 작은 폴더를 만들어 ‘팥진아’라고 적어두었지만 성을 ‘팥’으로 바꿀 만큼 팥의 모든 면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닌 이야기다.


임진아 작가의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에서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임진아 작가 편>

오늘은 에세이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를 쓴 임진아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황정은:이번 책이 팥을 향한 마음을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작가님 그림을 표지로 사용을 했어요. (그림 속의) 이 작은 사물들이 다 책에 나오는 그 음식과 사물들인 거죠. 이 그림 그릴 때 어떤 고민하셨는지 궁금해요.

임진아:‘띵 시리즈’ 같은 경우는 글 작가 분이 일러스트레이터 분이랑 협업하는 식의 시리즈인데요. 제가 그간 냈던 책들이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같이 선보이는 작업물이어서, 이렇게 글로만 선보이는 게 처음이었더라고요. 그래서 좀 뜻깊기도 했었는데요. 그래서 제가 각 잡고 제 책의 표지 작업을 제대로 한 게 처음이었어요.

황정은:그렇습니까? 원래 작가님 책에 다 작가님의 그림이 실려 있잖아요?

임진아:맞아요. 그런데 대부분 본문에 들어가는 그림들을 디자이너 분이 디자인으로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제 책이 나왔을 때 제일 좋아하는 과정 중에 하나가 표지 시안을 보내주실 때예요. ‘디자이너 분이 어떤 그림을 골라주셨을까’ 이런 고민을 같이 해나가면서 선물 받듯이 시안을 받는 날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이 책 같은 경우에는 그림을 제가 그려야 하니까 너무 고심이 많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저도 다른 작가(일러스트레이터) 분이랑 같이 이어주시나요?’ 이런 얘기도 했었는데, 제 글에는 역시 제 그림이 제일 어울린다는 생각을 저도 편집부 분들도 하게 되어서 제가 표지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정말 엄청 고민을 해가면서 두어 차례 시안을 잡고 그렸는데, 계속 고민이 많이 들더라고요. 원래는 스노우볼 그림이 아니었고 작은 사람 캐릭터가 눈사람을 닮은 호빵 찐빵들을 손에 들고 있으면 옆에서 호빵 찐빵을 닮은 눈사람이 그걸 쳐다보면서 ‘오잉?’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을 먼저 그렸었어요. 거의 그 그림으로 매듭을 짓고서 그림 작업을 끝냈었는데 계속 꿈에 스노우볼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이런 느낌이면 어때?’ 라고 계속 꿈에서 나와서 아침에 작업실로 달려가서 하루 종일 스노우볼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사실 번복하는 것도 좀 창피한 일이잖아요. 이미 그림을 다 보내드렸고 (편집부에서) 디자인 시안을 잡고 계실 것 같은데. 그런데 조금 용기 내서 보내드렸었는데 편집자 님이 너무 좋아해 주시기도 했고, 또 신기했던 게 편집자 님도 시안 생각하시면서 스노우볼을 떠올리셨대요.

황정은:그래요?

임진아:네, 그런데 이미 제가 그림을 몇 차례 그린 다음에 이야기 하시기가 조금 어려우셨나 봐요. 아무래도 그림을 또 그리는 게 노동이기도 하니까 고민하다가 이야기 안 하셨는데, 제가 메일을 보냈을 때 스노우볼 그림이 있어서 엄청 기쁘셨다고...

황정은:혹시 텔레파시 보내신 거 아닙니까? (웃음) 저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임진아:자꾸 꿈에 나왔던 이유가... (웃음) 어쩐지 꿈이 자꾸 ‘이거 어때? 이렇게 할 수도 있지 않아?’ 이런 느낌인 거예요. 그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표지를 보면 만족스럽습니다.

황정은:그렇게 나온 표지네요. 스노우볼 안에도 그렇지만, 이 표지 안에 작가님이 좋아하는 걸 다 모아둔 것 같아요. 여기 보면 찐빵 호빵도 있고 찻주전자도 있고 책도 있고, 그리고 팥 들어간 과자들이 있잖아요. 제가 붕어빵이랑 딸기까지는 알아봤는데, 옆에 있는 먹거리들은 각각이 뭔지는... 오른쪽에 있는 게 찹쌀떡이겠죠?

임진아:네, 한 입 베어 문 건 찹쌀떡이고요. 딸기 밑에 있는 건 국화빵, 그리고 찹쌀떡 위에 있는 건 도라야끼입니다.


황정은:제목도 좋지 않습니까?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 그런데 작가님이 지으신 제목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이 말이 책에 등장합니다만, 이번 책을 기획하고 편집을 담당한 김지향 편집자님이 제목을 지으셨다면서요? 왜 이 문구를 제목으로 권하셨는지 혹시 들으셨나요?

임진아:일단 (제목) 후보가 몇 개 왔을 때 저도 이것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황정은:그랬을 것 같아요. 후보로 어떤 제목들이 있었는지 궁금한데, 들어도 될까요?

임진아:책에 있던 꼭지 중에 하나인데 「대단한 에피소드는 없지만 사랑해」도 제목으로 골라주시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의 제목에) ‘나’가 두 번이나 들어가잖아요. 에세이를 쓸 때 ‘나’를 빼는 글이 많은데 ‘나’가 두 번이나 들어가는 제목이라는 게 이상하게 개운하고 박력 있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저 혼자 생각했던 제목 중에는 ‘찐빵이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런 식의 제목을 떠올리기도 했어요. (웃음)

황정은:작가님, 제목 잘 짓는 편이십니까? (웃음)

임진아: (웃음) 누가 봐도 제목처럼 안 느껴지는 제목이잖아요.

황정은:좋기는 좋은데요. 제목으로는... (웃음)

임진아:힘이 없습니다. (웃음)

황정은:힘은 있어요.

임진아:그런데 10명 중에 2명한테만 가 닿을 힘이어서...

황정은:혹시 (편집부에) 이야기 하셨어요? 이런 제목 하고 싶다고?

임진아:이야기했었어요. 그냥 ‘이런 것도 생각해봤습니다’ 했는데, 당연히 저를 포함해서 모두의 의견이 ‘나 심은 데 나 자란다’로 결정이 됐고. 지금의 제목이 좋았던 이유가, 저는 팥이 들어간 음식의 이름에 팥이 안 들어간다는 점이 참 좋더라고요. 호빵도 그렇고 찐빵도 그렇고 호두과자, 붕어빵, 양갱, 시루떡도 누구나 이름을 듣자마자 팥을 떠올리지만 이름에는 (팥이) 다 숨겨져 있단 말이에요. 이 책도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쓰기도 했고, 또 찐빵을 먹을 때 밀가루 부분이랑 팥을 같이 먹어야 맛있는 것처럼 제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제 이야기들을 팥의 비율과 비슷하게 썼는데요. 그런 글이랑 너무 잘 맞는 제목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정은:제목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까 더 제목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에세이 제목에 ‘나’가 등장하는 경우도 별로 없지만 두 번이나 들어갔는데 이렇게 매력 있기가 또 힘든 것 같아요. 저도 이 제목이 좋습니다.


황정은:저는 사실 팥을 이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호빵은 대단히 좋아해요. 그리고 책에 앙꼬절편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시루떡 얘기도 있고. 저도 다 좋아해서 책을 읽으면서 계속 먹고 싶더라고요. 독자 리뷰에서도 팥 음식 이야기가 많이 올라올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임진아:그간 제가 낸 책들은 대부분 (리뷰와 함께) 어느 카페나 밤 시간을 보내는 테이블 그런 사진이 많이 올라왔는데 이번 책은 그렇게 자기 동네 붕어빵을 같이 자랑하시면서... (웃음)  그리고 또 어떤 분은 제주도 여행 중이신가 보더라고요. 계속 오메기떡을 한 입 문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시고 저를 태그하시면서 ‘갖다 드리고 싶다’ 이런 글을 올리시고, 다음 날에는 귤이 들어간 찹쌀떡 사진을 올리시면서 또 저를 태그하시고, 그렇게 누군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는 후기를 계속 보고 있습니다.


황정은:지금까지 작가님은 빵, 도쿄, 책 그리고 강아지 ‘키키’처럼 작가님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글로 써오셨는데요. “혼자 걸을 줄 알면서부터 꼭 한 가지 이상은 좋아하며 지냈다”라고도 하셨어요. 그리고 스스로를 ‘매일 무언가를 좋아하기 일상 전문가’라고 소개도 하셨는데요.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계속 늘려가고 또 말하는 것이 작가님에게도 힘이 됩니까?

임진아:그런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게 꼭 있었더라고요. 우선 저는 참 저 자신을 좋아하면서 자란 것 같아요. 그게 생각보다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살면서 많이 느끼는데, 그래서 제가 뭔가 관심을 두거나 하는 것들에 늘 스스로가 반가워했던 것 같아요. 아마 그 어린 시절에는 일종의 생존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요즘 많이 하게 되는데요. 제가 내내 제 방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생 때까지 오빠랑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한데요. 오빠랑 방을 쓸 수밖에 없는 집안 형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재미있는 것들은 너무 많았단 말이에요. 오빠랑 라디오를 듣는다거나 밤새 같이 만화책을 보고 웃는다거나, 그렇게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항상 제 방에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 보니까 오빠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각자 좋아하는 게 분명히 있고, 집안 분위기가 안 좋으면 안 좋을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그걸 어렵게 사 모으거나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인생은 이건 아니야’라고 스스로한테 보여주고 각자한테 얘기해 주는 과정이 되게 지난하게 흘러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뭔가를 좋아하면 되게 반가워요. 지금은 제 생활을 시작하고 찾아서 굉장히 평온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데, 언제나 제 후기를 제일 궁금해 하는 사람이에요. 뭔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하면서 ‘이게 왜 좋은지 어떻게 설명할까’를 내내 기다리면서 메모장에 적어가면서 블로그에 긴 글도 써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걸 말하기 시작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마 30대 내내 썼던 책들이 그런 이야기들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정은:이번 책의 첫 번째 꼭지 제목이 「똥 맛 카레와 카레 맛 똥」이거든요. 음식 에세이 첫 글 제목에 똥이 들어가는 책이 어디 있느냐고, 작가님이 SNS에 직접 쓰셨다면서요? 그런데 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쓰고 싶었고 지금의 순서로 배치를 하고 싶었다’라고도 하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임진아:사실 이게 프롤로그 다음에 쓴 꼭지여서, 교정지 받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첫 번째 글이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원고를) 보내면서도 편집자 님이 어떻게 읽으실까 고민했었는데 교정지에 떡하니 같은 제목으로 있기에 ‘역시, 정말 웃기신 분이라니까’ 이렇게 생각을 했었고요. (웃음) 저는 뭔가 좋아하는 게 있거나 뭔가 느끼는 게 있으면 ‘왜 그런지’ 저 끝까지 한번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요. 그래서 도착한 곳이, 친구가 그 이상한 밸런스 게임을 던졌던 차 안과 오빠 친구가 구멍가게에서 던졌던 이야기가 갑자기 붙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왜 팥소를 좋아할까’에 더해서 ‘내가 싫어하는 음식은 왜 싫어할까’를 같이 생각하게 되면서 좋아하는 음식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었어요. 그 꼭지를 쓰면서 팥소를 되게 까다롭게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팥소를 보면 쉬는 마음이 되는 게, 단지 그게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되게 편하게 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라는 걸 얘기하고 싶더라고요.


황정은:책에 실린 글 중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글이 있잖아요. 책의 제목이 나온 맥락의 글이기도 한데요. 내용을 보면, 고등학생 때 친구들하고 땡땡이를 치고 빙수를 드시러 가셨던 거잖아요. 그런데 바로 잡혀 들어가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데, 선생님이 때리면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을 한 거 아닙니까? 되게 난폭한 상황인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폭력에 집중을 한 게 아니고, 글 마지막에서 ‘나 심은 데에는 결국 내가 자란다’라고 적으셨어요. 저는 이게 임진아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는 재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울적한 상황을 임진아 작가님의 스타일로 번역을 해서 ‘굳이 그 울적한 상태에 내가 몰두하지 않겠어’라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게 굉장히 큰 장점이고 읽으면서 매력을 느끼는 부분인데, 그래서 이렇게 근사한 제목도 나오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을 드려보고 싶어요. 오래전에 심은 임진아 중에서 어떤 부분이 지금 임진아의 심지가 되었는지.

임진아:저도 참 궁금하네요. 어렸을 때 저를 가장 가까이 봤을 엄마가 저한테 ‘넌 옛날부터 일단 앉기만 하면 계속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앉아서 같은 걸 하진 않았거든요.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또 지루해지니까 과자 뒤의 성분표 봤다가, 이렇게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엄마가 보기에는 ‘쟤는 참 진득하게 앉아 있다’ 싶으셨는지 참 신기했다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아마 그렇게 나랑 노는 게 재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저는 오빠라는 제일 친한 친구가 있었지만 혼자서도 되게 잘 놀았었던 기억이 나요. 그게 우울하거나 힘들지는 않았고, 집에 오면 늘 빈집이었었는데 그 시간 동안 그냥 한사코 즐겁게 놀고 싶었어요. 나가서 그냥 벌레랑 놀더라도.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요. 혼자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랑 참 친하게 지냈다’라는 생각이 요즘도 많이 들어요. 사실 요즘도 집에 있거나 하면 참 바쁘거든요. 그런 것들이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또 아주 어렸을 때도 이를테면 벌레가 죽어 있거나 새가 죽어 있거나 그러면 꼭 묻어줬었어요. 묻어주고 팻말 세워주고 했었는데, 요즘도 지나가다가 다친 새가 있거나 벌레가 있거나 이런 걸 보면 ‘나라면’ 이런 생각이 들어서 묻어주거든요. 그런 것들이 모여가지고 제가 어떤 좋은 일이 있을 때, 이렇게 <책읽아웃>에 나온다거나 했을 때, 선물 주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내가 묻어줬던 개똥이가 이렇게 선물 주는 건가’ 이런 생각도 가끔 하게 되고. 참 그런 게, 한마음이 내 한 시절을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아요.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
팥 : 나 심은 데 나 자란다
임진아 저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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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아웃] 세상에는 케이크를 3등분으로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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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미야구치 코지 저/부윤아 역/박찬선 감수 | 인플루엔셜



한자(황정은):오늘 저희가 읽고 와서 이야기 나눌 책은 단호박 님이 고른 책입니다.

단호박:맞습니다. 미야구치 코지 저자가 쓰고 부윤아 번역가가 옮기고 인플루엔셜에서 출간한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인데요. 전반적으로 초록색인 표지에 분홍색으로 크레파스 같은 무언가로 선을 그린 느낌의 표지입니다. 한자 님이 처음에 ‘이 표지가 내가 기억하는 표지가 아닌 것 같다’라고 하셨는데,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 표지를 처음으로 본 거여서. 아마 그 전에 다른 판본으로 나왔었을 수도 있고요.

한자(황정은):제가 57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으로 이 책을 기억을 하고 있었나 봐요.

단호박:아, 맞아요. 이 그림이 굉장히 많이 인터넷에 돌아다녔었죠. 소년들이 그린 그림을 저자가 다시 그려서 책에 실은 건데요.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이라고 제목을 말씀드렸다시피 이 책에 ‘케이크를 똑같은 양으로 잘라봐라’라고 주문을 했을 때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케이크를 자른 그림이 하나 나옵니다.

이야기를 천천히 한번 해보도록 하죠. 미야구치 코지 저자는 아동정신과 의사인데요. 소년원 법무기관에서 일했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공립 정신과 병원에서 아동정신과 의사로 근무를 했었고, 발달장애 아동이나 학대 피해 아동이나 등교 거부 아동, 사춘기 아이들을 진찰하고 진료했다고 합니다.

방금 전에 케이크 이미지가 나왔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저자가 충격을 받은 부분도 딱 그 부분이었죠. 소년원에 가서 아이들을 진찰하고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는 건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치는데 ‘케이크를 3명이서 똑같이 나눠 먹는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잘라봐라’라고 했더니 그 중에 몇 아이들이 일단 케이크의 원형을 절반으로 자르더래요. 그러고 나서 한참을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을 하다가 다시 절반으로 자른 걸 4분의 1로 자르고 나서 다시 멈춘 거죠. 그래서 아이가 실수를 했구나 하고 새로 원형의 그림을 주면서 ‘다시 잘라볼래?’라고 했을 때 또 똑같이 절반으로 일단 잘라놓고 다시 굳어진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표지에도 일부분 실려 있는 그림인데요. 57페이지에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을 보시면 일단 원형을 절반으로 갈라놓고 그 다음에 고민을 하다가 나머지 절반을 또 절반으로 가른 그림이 있고요. 두 번째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그림은 ‘그렇다면 케이크를 5명이서 똑같이 나눠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니?’라고 그랬더니 소년원에 있는 친구가 ‘그건 할 수 있어요’라고 하더니 자신 있게 수박에 줄을 긋는 것처럼 크게 4개의 선을 일직선으로 긋는 거죠. 그리고 한 친구는 케이크를 4등분 하더니 5명이서 어떻게 먹어야 될지 고민을 하다가 1/4 조각 중 하나에 금을 그어서 5개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 어느 것도 똑같이 나눠지지 않는 거죠. 미야구치 코지 저자는 그때 ‘이 아이들이 지금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뉘우친다거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구나,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어그러져 있구나, 이 방식대로라면 이 친구들이 소년원에서 내가 정말 잘못을 했고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구나’라고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이 문제가 여러 번 이야기에 오르고 있죠. 경계선 지능 장애라고 해서, 기존에 ‘IQ가 몇 이하라면 이것은 장애입니다’라고 판별하는 기준이 있는데 70 이하가 장애로 판정이 되고 있고요. 70~84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을 경계선 지능 장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경우에는 장애 판정이 안 되고 장애 관련 복지라든지 그런 것을 얻지 못하고 다른 말로 하자면 ‘느린 학습자’라고 지금은 불리고 있는데요. 70~84의 경계에 있는 아이들에게 상대적으로 학습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고 학습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중도 탈락을 하게 된다거나 그런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미야구치 코지 저자의 경우에는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경계선 지능 장애에 관해서는 소년원에 간 친구들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적으로 저희가 이야기를 해봐야 될 주제라고 생각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냥:저는 케이크 그림이 나오기 전에 엄청 충격을 받은 그림이 있었는데, 33쪽에 나와요. 저자가 소년원에 근무를 시작하면서 만났던, 굉장히 거칠게 이야기하면 사건 사고를 많이 일으키는 재소자 소년의 인지능력을 검사하기 위해서 ‘이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려봐’라고 말했던 거죠. 그런데 따라 그리는 건데도 결과물이 정말 달라요. 33페이지에 예시였던 그림과 실제로 소년이 그것을 따라서 그린 그림이 같이 실려 있는데, 이 한 페이지만으로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가 똑같은 것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보고 파악하는 것’ 자체가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를 수가 있고 그러면 그것을 파악한 결과인 ‘이해’ 즉 어떻게 이해했느냐도 다를 수 있다는 깨달음이 크게 왔어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깨달음과 충격이 계속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한자(황정은):저도 그 그림이 상당히 충격이었어요. 저자도 그 그림을 보고서 충격을 받아서 직장을 아예 옮긴 거 아닙니까? 병원을 나와서 교정시설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된 건데, 초반부터 그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저자를 좀 믿을 수 있는 상태에서 글을 읽기 시작했어요. 이런 류의 글을 읽을 때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좀 믿으면서 읽을 수 있었고. 33페이지의 그림을 딱 펼쳐둔 순간에, 이 그림을 저자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이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저도 비등한 정도의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냥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애초에 세상을 보고 듣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그 그림이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그림을 눈으로 보자마자 느낀 무참함이 있었는데, 그동안 얼마나 세상 사는 게 힘들었을까.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데 사회에서는 이들을 향한 평가가 너무나 가혹한 거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교정시설에 도착할 때까지 어디에서도, 그걸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많이 무참했고 그리고 정말 슬펐어요.

가정에서 이들의 상태가 발견이 되지 않는 이유가 책에서도 언급이 됩니다만 크게 두 가지잖아요. 첫째가 아이를 담은 환경이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그런 다음에 병원에 데려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발견이 안 된다는 거죠. 즉 가난하거나 학대를 겪고 있는 사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보호자의 상태가 아이의 상태와 다르지 않은 경우를 짧게 언급을 하더라고요. 학교에서도 발견이 돼야 되는데 안 된 거죠. 학교는 학업 성적 결과를 중심으로 학생들을 판단하는 시스템이라서 학생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일단은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에 있다 보니까 그 잣대로 보면 이들은 그냥 공부 못하는 학생들인 거예요. 학업 부진을 겪는 학생들이고. 이런 단순한 기준으로는 이 청소년들의 상태를 알 수가 없고. 그런데 한편으로 저는 이 ‘알 수 없음’ 상태가 대단히 능동의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호박:어떤 면에서죠?

한자(황정은):개개 학생이 가진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점점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많이 걱정이 됐어요. 왜냐하면 선생님들에게 여력이 없어요. 반에 이런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어도 그 문제를 발견해도 지금 교육 여건에서 교사들이 할 수 있는 바가 많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모로 이 그림이 준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냥:단호박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최근에 경계선 지능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고 저도 최근에 뉴스를 통해서 접했어요. 우리가 흔히 평균적이라고 하는 지능보다 조금 낮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 어려움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생각보다 많고, 우리가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자세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는데요.

(경계선 지능을 가진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낮은 수준의 일상생활을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고, 그래서 부모를 비롯해서 교육 현장에 있는 분들도 알아차리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거죠. 그게 정말 맹점인 것 같아요.

한자(황정은):제가 아까 ‘알 수 없음의 능동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좀 했는데, 교실 안에 더 큰 문제로 다뤄지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돼서는 안 되는 상황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런 학생들 같은 경우는 한두 번의 관심으로 상태가 학습 능력이 개선이 되는 게 아니라서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까 더 몰이해라든지 무지의 상태로 그냥 두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저는 좀 들기도 했고요. 가뜩이나 지원이 부족하고 세상의 이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그림을 그린 이들이 너무 갑갑하게 살았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이들이 결국은 소년원이나 교도소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가 너무 기가 막혔어요.

단호박: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쟤는 꼴통이라서 그래, 쟤가 심성이 나빠서 그래’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냥 인지 능력이 부족해서 쉽게 그것을 화로 대체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서 그런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표현을 하고 있거든요.

한 번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다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모두가 이런 경계선 지능인 것은 절대 아니고요. 특정 교정 시설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원인 자체가 그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한 느린 학습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고요.

한자(황정은):근데 그 비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30% 이상이고요. 저자가 만나는 내담자들이 대부분 청소년이라서 성인의 경우까지는 책에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저자가 추측하기로는 성인의 경우에도 재소자 중에도 상당수가 있을 거라고 예측을 하죠.

저자가 소년원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이 범죄를 저질러서 그 시설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살인을 저질렀다거나 성폭력을 저질렀다거나 혹은 미수라도 범죄에 준하는 처벌을 받은 학생들인 거잖아요. 그런데 이들 중에서 단호박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경계선 지능이나 혹은 낮은 인지 기능을 가진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서 내내 하는데, 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범죄에 노출되기가 더 쉬운 환경인 거잖아요. 그래서 결국 소년원에 다다르는 과정을 이 책이 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패턴이 이렇잖아요. 기존의 학습이나 교과 과정에서는 소외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니까 당연히 수업을 따라가질 못하죠. 그리고 또래 집단에서는 또 이해를 받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까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에 울분을 쌓고, 그러다 보니까 범죄에 노출되고, 범죄 환경에 노출이 됐을 때 저지를 확률도 높아지고, 사실 이들이 범죄에 다다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들이 갖고 있는 낮은 인지 기능이라든지 경계성 지능이라기보다는 세상의 몰이해 혹은 무지가 원인이라는 점을 책에서 짚고 있어요.

그냥:맞아요. 그래서 저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4차 장애’라고 표현한 게 가슴에 콕 박혔는데요. 이렇게 쓰여 있어요. 1차 장애는 장애 자체에 따른 것, 2차 장애는 주변에서 장애에 대한 이해를 받지 못하고 학교 등에서도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따른 것. 3차 장애는 비행을 저지르고 교정시설에 들어왔는데 역시나 이해받지 못하고 엄격한 지도를 받아 한층 더 악화되는 것, 그리고 4차 장애는 사회에 나와서도 이해받지 못하고 편견 때문에 일을 계속하지 못해 다시 비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정리를 해 두었거든요. 이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고 있고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거예요.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저자가 만났던 사람들이 재소자이기 때문에 책에서 그들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지만, 꼭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고 교정시설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더라도 경계선 지능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를 시작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을 이 책이 많이 제공해 준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정말 또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학교에서는 이들을 지켜보고 지도하고 관리를 해줄 선생님이 있지만 사회에 나오면 그렇지 않은 거예요. 누구도 나를 배움이 마땅한 존재로 보지 않고, 그러니까 실수해도 끌어주고 돌봐줘야 할 존재로 보지 않고, 그리고 겉으로는 경계선 지능이라는 게 크게 티 나지 않기 때문에 ‘너는 왜 이걸 못해, 다른 사람 다 하는데 왜 이게 안 돼’라는 평가를 계속 받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사회에서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매번 그런 지적과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그곳에 오래 있을 수 없고, 그러면 자꾸 일을 그만두거나 옮기는 일이 생기고, 나이가 들수록 이 사람의 경제 기반이 다져지지 못하죠. 아니면 ‘나는 더는 경제 활동을 못하겠다’ 해서 집에서 은둔하는 경우도 생기고요. 책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요. 막연한 상상이라든가 추론이 아니고 정말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서, 지금 그러고 있을 많은 청춘들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단호박:인지 기능이 약한 청소년의 경우에는 특징이 있다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요. 이 책에서는 ‘5 1’로, 5가지 기능 플러스 한 가지 기능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으로인지 기능이 약하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요. 느린 학습자의 경우에는 보고 듣고 상상하는 힘이 약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될 거야’라고 상상하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돈이 모자를 때는 ‘부모님한테 빌려야지’ 혹은 ‘빌린 다음에 3개월 동안 일해서 벌어서 다음 갚아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애를 때려서 빼앗아야겠다’ 이런 식으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로로만 가게 된다는 거죠. 두 번째로는 감정 제어 능력이 약하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요. 감정을 통제하는 걸 어려워하고 쉽게 화를 내고 그래서 인지 과정까지 이르는 데에 화가 가로막기 때문에 추론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요. 세 번째로는 융통성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요. 어떤 일이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고, 혹은 ‘이런 경우가 생길 때는 이렇게 행동해야지’라고 한 번 정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네 번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평가가 부적절하다는 항목이 있었어요. 자신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사회 안에서 나의 위치가 어디고 지금 내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거죠.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부족해서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안에 갇히게 되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고요.

한자(황정은):이 내담자들이 교정시설에 들어와 있는 상황 아닙니까? 그래서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인 거예요. 밖으로 나갔을 때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그런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일단은 자기 인식이 있어야 변화를 할 수가 있는 거잖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거기에서 달라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자가 이걸 굉장히 중요하게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따로 챕터를 활용을 해서 서술을 많이 하고 있어요.

변화가 있으려면 자기 성찰이나 자기 반성이 있어야 되는데, 이 성찰과 반성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즉 자기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하는 일인데, 이 점을 저자가 짚고 있어요. 그래서 변화의 요인으로 두 가지를 중요하게 꼽습니다. 나를 아는 것, 그리고 자기 평가 향상이 있더라고요.

저자는 실제 현장에서 경험으로 효과를 본 수업 방법을 소개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자기 평가 향상은, 수업 과정에서 발견을 한 건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질 못한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포자기 하듯이 ‘그럼 너희들이 나와서 해봐’라고 이야기했더니, 앞에 나와서 자기들이 직접 가르치는 역할을 너무 하고 싶어 하고 답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 과정으로 자기 평가가 놀라가는 걸 경험을 했다는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 자기 인식을 강화하는 방법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데, 자기 인식이 중요한 이유가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기준이 있어야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규범이 내면에 쌓이는 거잖아요.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일, 이건 해도 되는 일, 이런 규범이 생기는데. 내가 갖고 있는 규범하고 실제로 내가 하는 행동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경우에 사람은 누구나 불쾌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이런 걸 느껴야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구나’ 깨닫고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된다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인지기능에 문제가 있는 청소년의 경우에는 자기 인식이 부족한 상태라서 자기 성찰이나 반성이 앞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수업을 통해서 자기 인식을 키워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좋은 점이 현장에서 효과를 거둔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제가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경계선 지능이라든지 낮은 인지 기능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대면했을 때 실제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트레이닝 방법이 있거든요. 하루에 5분씩만 해서 인지 기능을 훈련시키고 단련시킬 수 있는 방법까지도 소개를 하고 있어요. 해결 방법이 허황되지 않아서 저는 너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단호박:아까 문제 아이들의 특징을 이야기했는데, 그 특징들로 인해서 다섯 번째 특징이 생긴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특징은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이 약하다는 점인데요. 융통성이 없고 자기 평가가 없고 감정 제어 능력이 약하니까 그 결과로 인해서 사람들이 점점 더 이 사람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걸 힘들어하고, 그러다 보니까 점점 더 고립되고 계속 악화되는 지점을 짚고 있습니다.

플러스 원( 1)으로 설명해 놓은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신체 운동 기능이 떨어진다는 부분이 있었잖아요. 이게 왜 플러스 원이냐 하면, 어렸을 때 운동을 시켰거나 아니면 운동부에 들어가서 신체 능력을 발달시킨 친구들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경우에는 신체 운동 기능은 매우 뛰어나지만 다른 부분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이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더 사고를 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거죠. 신체 운동 기능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뭐였냐면, 자신의 몸을 다루는 것이 서투르다는 거였거든요. 세밀한 손동작을 하지 못하거나 ‘내가 이렇게 걸었을 때 어느 쪽으로 갈 것이다’라는 인지 기능이 제대로 정립이 안 되기 때문에 자주 넘어진다거나 일을 할 때 잦은 실수가 생긴다거나, 그래서 이 특성으로 인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나빠지고 또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자(황정은):  저는 이 책에서 많이 생각한 말이 있었어요. 대부분 많이 생각을 하게 했지만 그중에 가장 저를 생각하게 만든 말이 이거였는데요. ‘미성년 범죄가 일어나면 사회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몰두할 뿐 어떻게 하면 막을 것인가를 덜 고민한다. 혹은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이 책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말을 많이 생각했는데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되짚어보고 탐구하는 일도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문제를 개선한다거나 해결하는 일의 초석에 그 단계가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저희가 이야기했듯이, 영국 사회에서 아동학대나 아동 살해를 막기 위해서 하는 일 중에 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오답 노트를 작성한다는 거잖아요.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에 나온 내용이기도 한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은 사실은 어떻게 하면 막을 것인가를 묻는 과정의 첫 번째 질문인 것 같아요. 꼭 필요한 질문이고.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한국 사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 사회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질문이 있어요. 대단히 격렬하게 있는데, 그런데 이 질문이 매우 도착적이고 유희적인 관점에서 잠깐 발생했다가 그냥 사라지고는 해요. 어떤 끔찍한 개별적인 괴물의 소행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그냥 소비되고 말 뿐이죠. 사건 자체가 그렇다 보니까 질문의 토대 자체가 매우 약합니다. ‘어떻게 하면 막을 것인가’ 이 고민도 한국 사회에 있어요. 그런데 애초에 이 질문이 토대가 약하고 약간 엉뚱한 방향으로 쌓이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막을 것인가’라는 고민이 한국에서는 예컨대 촉법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지기도 한단 말이죠.

촉법 연령을 낮추자는 요구에 따르는 이야기들은 사실 매우 고통스럽고 또 조심스럽습니다. 특히 피해자라든지 가족 입장을 생각하면 그냥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반대로 촉법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말은 대단히 쉽게 나옵니다. 저는 촉법 연령이라는 것은 ‘어떤 미성년 개인이 미성숙하거나 혹은 반사회적인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속한 사회가 그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하고 그 책임을 나눠지겠다는 일종의 마지노선 성격을 가지는 선언’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느끼기에는 촉법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 증가하는 것 같은데,  이런 요구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이유는 그쪽이 아무래도 쉽기 때문인 것 같아요. 미성숙한 혹은 내면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를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꾸준히 노력해서 문제의 원인을 없애는 데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가겠습니까? 그보다는 처벌 연령을 대폭 낮추는 게 쉽겠죠. 그렇지만, 예전에 문유석 전 판사님이 오셨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형법은 모든 갈등과 사건의 최종 지점이에요. 왜 최종 지점에서 원인을 찾습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우리 사회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호박: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촉법 연령에 관한 문제는 저는 가두리 양식 같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문제가 보이는 것을 일단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 시설에 넣거나 교도소에 넣거나 교화 시설에 넣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하자라는 식으로만 지금 반영이 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됐고요.

2010년 한국 연구에 따르면 82명의 성폭력 가해 청소년의 지능을 검사했을 때 26.5%에 해당하는 19명이 지적장애 혹은 지적 경계선 지능에 해당하는 지적 수준을 보였다는 연구가 있었고요. 그리고 2016년 기준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연구를 했을 때 전국의 소년원에 있는 118명의 보호소년 중에 정신질환이나 품행장애로 정신건강 치료가 필요한 보호 소년이 230명 전체 인원 대비 26.6%였고요. 이 중에 37%가 지적장애 및 경계선 지능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교화시설에서 정신건강 치료가 필요한 보호소년이 적어도 23% 라는 점은 어쨌든 이 친구들이 범죄를 저질렀고 교화 대상이긴 하지만 반면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뜻이 될 거고요. 37%의 치료가 필요한 친구들 중에 1/3 정도가 경계선 장애 내지는 지적 장애 문제를 가졌다는 것은 이 친구들에게 낮은 인지 과정을 치료할 혹은 좀 더 나아지게 할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여태 부재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런 지점을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단호박:오늘 저희가 같이 읽은 책은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이었고요. 미야구치 코지 저자, 부유나 역자, 그리고 박찬선 교수의 감수로 만든 책입니다.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다음에 저희가 읽을 책 무엇이죠?

그냥:다음에 같이 읽을 책은 제가 골라봤는데요. 방구석 저자가 쓰고 김영사에서 만든 『취미가 우리를 구해줄 거야』를 같이 읽겠습니다.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미야구치 코지 저 | 부윤아 역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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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인정받고 싶지만 왜 출근하기는 싫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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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눈 뜨는 게 괴롭고,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거나, 퇴근을 했는데도 일거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당신의 출근길은 아마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지 않을까? 여기 15년간 수많은 직장인을 만나 상담하며 그들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해 책까지 집필하게 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있다. 바로 『출근길 심리학』의 저자 반유화다. 저자를 만나 직장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심리학을 통한 솔루션을 찾아보자.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15년째 내담자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이야기 나누고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반유화입니다. 지금은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내담자들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죠. 아무래도 회사가 많은 광화문에는 다양한 직장인 내담자분들이 찾아와 주시는데,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에게 어쩔 수 없는 일에 연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제시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을 살펴보니 총 세 개의 파트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하는 부분들을 각각의 장으로 나눴어요. 그래서 1장에서는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 2장에서는 일하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3장에서는 업무 효율과 성과를 이야기하게 되었죠.

특히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이라 하면 열등감, 불안, 허무, 분노 같은 것들이 있겠습니다. 일하면서 이런 감정들 한 번쯤 안 느껴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주 일반적이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운 감정들이죠. 그래서 책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너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말라고 적었어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 어느 정도씩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되고, 다만 이 감정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어떻게 다루는 게 가장 적절할까를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죠.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 잘 담겼다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일하면서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던데, 심리학을 알면 정말 인간관계의 어려움 극복에도 도움이 될까요?

저를 찾아오시는 내담자 분들도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항상 말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인간관계는 저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의 인간관계랑 회사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약간 다른 것 같아요. 피할 수가 없잖아요. 평소에 마주치는 소위 이상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관계는 눈 딱 감고 제가 피하거나 안 보면 되는데 직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더 고통스러운 거죠. 저 사람과 어느 정도로 친밀하게 지내는 게 적당한지, 매일 마주해야 하는 꼰대 상사에게는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협업 부서와의 갈등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늘 고민스럽죠. 당연히 인간관계에 정답은 없겠지만 이 책이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정답을 찾는 데 첫걸음이 되어줬으면 했어요. ‘이런 관계에서는 이런 심리학 법칙이나 저런 심리학 이론을 활용해보면 좋겠다. 나한테는 이 법칙이 잘 맞을 것 같아!’ 하는 식으로 말이죠.

인간관계에 활용할 만한 심리학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일의 효율과 성과와 관련해서는 어떤 활용 팁이 있을까요?

아마 사람들이 가장 많이 궁금한 파트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제가 원했던 실용적 팁을 가장 많이 줄 수 있는 파트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중제목 서브도 심플하게 정했던 것 같아요. ‘설득의 심리학’, ‘발표의 심리학’, ‘칭찬의 심리학’, ‘미루기의 심리학’… 일하는 마음을 돌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일의 효율을 높이고 성과를 내는 것으로 힘을 얻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잖아요. 그 마음에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설득을 할 때 제1원칙은 나부터 설득하는 것, 발표를 할 때는 긴장보다는 설렘으로 감정을 재구성하기, 칭찬할 때는 상대가 소속된 집단과는 무관한 것으로, 미루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면 해야 할 일을 조각으로 분해하기. 이렇게 짧게 설명하자니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네요. 책에서 확인해 주세요!

조금 더 길게 소개해 줄 만한 내용이 있다면 부탁드릴게요!

‘분노’와 관련된 내용은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대 직장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출근길 지옥철을 떠올려 봅시다. 문이 열리자마자 내가 내리기도 전에 사람들이 어떻게든 타려고 꾸역꾸역 들어오는 상황인 거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김없이 분노가 치밀 텐데, 이때는 당신의 분노가 어떤 성격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중요해요. 그 상황에서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리기 전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타는 일은 존재할 수 없다’라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세계관이 깨진 것인지,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내리고 난 후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타면 좋겠다’라는 타인과 세상을 향한 소망이 깨진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죠. 세계관이 깨진 것이라면 우리는 소망은 여전히 간직하되 세계관을 수정해가며 분노에 제동을 걸어볼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심리학을 알면 그냥 분노를 잠재우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분노의 원인을 찾아내서 좀 더 손쉽게 해결해 나갈 수 있어요.

유튜브 채널 <놀심>을 운영 중이신 최설민님이 이 책을 ‘직장 생활 심리 바이블’이라고 소개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책 소개 간략히 해주세요.

모두 아실 테지만 이 책은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을 나열한 책이 아니라서 누군가를 입맛대로 조종하거나 스스로를 무조건 매력 있어 보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는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 일터에서 꼭 필요한 단단하고 유연한 멘탈, 냉철하지만 다정한 마음을 갈고 닦기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일하는 우리에게는 탁월한 능력도,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드는 친화력도 물론 필요하지만, 흔들리지 않으며 중심을 잡고 건강한 직장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비로소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고 내 마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책의 ‘마치는 글’에도 적어두었지만 모든 이들의 출근길을 응원하고 싶어요. 두려운 마음에 내 안의 감정을 외면하는 건 오히려 그 감정이 나를 잡아먹게 두는 것과 같습니다. 내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이미 게임의 절반은 공략한 셈이죠. 무너져 내리려는 내 마음을 알아보고 마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맞설 수 있고, 잘 견뎌낼 수 있고, 힘든 마음을 달래며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여러분에게 진심이 담긴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부속 의료원에서 수련했다. 12년간 1천여 명이 넘는 내담자를 만났고,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상처에 사회 환경 및 젠더 이슈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달았다. 이 문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에서 석사를 수료했다.

현재 광화문에 있는 병원에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위주로 진료하면서, 내담자들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시에서 개인의 감정을 주제로 진행한 〈토론극장: 우리_들〉에 설치미술가 박혜수 작가와 함께 참여하였으며, 작품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의 제작 및 분석에 협업하였다.

오랜 임상 경험의 정수를 담아낸 첫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에는 많은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내적 갈등의 근본적 원인을 깨닫고, 불편함을 온전히 바라보면서도 자기 삶을 단단히 지켜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출근길 심리학
출근길 심리학
반유화 저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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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속을 헤매던 여성의 ‘셀프 구원’ 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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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우울증 극복기』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띠는 책이다. 전이레 작가의 처절한 우울증 경험담을 드러낸 자전적 에세이이자, 확실한 우울증 극복법을 제시하는 방법서이다. 



먼저작가님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작가 전이레입니다. 어릴 적부터 공부만 하다가 대학생 때부터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우울증이었습니다. 중증으로 접어든 건 대학교 2-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이때는 정말 ‘병적이다’ 싶은 상황으로 접어들어 두려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도 우울증을 겪으면서였습니다.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내는 과정에서 글로 써보면 좋을 만한 생각들이 모였습니다. 자꾸만 꿈 주위를 기웃대니까, 필요한 방법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모였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생명공학도 출신의 이공계생에서 인문계 직업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온 사람, 이레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우울증 극복기 어떤 책인가요그리고 어떤 이들에게  책을 추천하나요?

‘이래도 되나?’ 싶은 솔직한 일화와 ‘이렇게까지?’ 싶은 구체적인 극복 방안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우울증 극복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누구나가 했을 법한 생각을 다루고, 누구에게나 효과적인 방법을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또, 이 책의 재미 포인트가 있는데요. 바로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시간 순으로 흥미롭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입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대상은 절망 가운데서 빛을 더듬거리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오래 어둠 속에 있어서 빛이 무엇이었는지, 삶이란 무엇인지, 뭘 위해 사는지 전혀 모르는 분들, 돌파구를 찾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앞날이 기대되지 않는 분들께도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한탄하던 마음이 주체적인 실천과 선택을 통해 ‘오늘은 어떨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탈바꿈하기를 바랍니다. 부디, 꼭!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우울증 완치에 이르기까지 작가님이 행한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그렇게 노력하던 때의 감정과 생각도 궁금해요.

책에 제가 우울증 완치에 이르기까지 행했던 대부분의 방법을 담았는데요. 무엇보다 도움이 되었던 건 하루를 시작할 때 휴대폰 대신 노트를 펼쳐 ‘모닝페이지’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닝페이지에는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나 행동의 순서를 적어내립니다. 하루를 비관하는 마음이 들 때는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적어보기도 했습니다.

모닝페이지를 쓰는 건 ‘안 되는 걸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중증 우울증일 때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면 잘 정리가 되지 않더라고요. 직접 손글씨를 쓰며 의욕을 고취시켰습니다.

사실 노력하는 제 모습은 정말 처절했습니다. ‘죽도록 하기 싫었다’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합하겠네요. 노력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차라리 우울증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우울증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생각을 배제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신기한 건 한 두 달 정도 지나니까 행동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아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귀찮지만, 할 만한 일이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즐겁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는  쉽지만은 않을  같아요어떤 생각이 작가님으로 하여금 이러한 이야기들을 꺼내 보이게 만들었나요?

피학적이었던 저의 과거 가정사를 드러낸 이유는, 저의 슬픔과 절망의 바닥이 타인의 바닥보다도 더 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정서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루트를 보여주기 위해 말입니다. 자랑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 꺼내 보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사실 원고를 집필할 때는 대중에게 어두운 과거 이야기를 꺼내 보이는 데 대한 두려움이 들지 않았는데요. 예약 판매가 시작되니 두려움이 둥둥 떠올랐습니다. 내게 이런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가감했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책에 담은 사연은 제가 겪은 일의 일부입니다.) 타인이 내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나의 용기와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누가 된다면? 이런 생각들로 앞으로의 파장이 두려웠습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런 솔직한 마음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더니, 남편이 대답하더라고요. 제가 이런 주제를 말하지 않으면 아직도 가정에서 곪아가는 사람들이나 중증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더욱 길을 헤매게 될 거라고요.

누군가는 비난하고, 누군가는 믿지 않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비슷한 일들을 겪은 사람들은 분명히 공명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이 꼭 필요한 분들께 가닿기 바랍니다.

남보다 내가 유독 불행하다고 느끼면 자기 연민이 커질 수도 있는데요글에서는 자기연민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요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실제로 자기 연민의 마음이 적었나요?

사실 저는 중학생 때부터 자기 연민이 극심했습니다.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초반에 가장 심각해졌고요. 침대에서 자기 연민으로 눈물 흘리면서 2~3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습니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겨야 아무도 가엽게 여기지 않는 나를 위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게 저의 아픔과 슬픔, 답답함을 풀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잘못 판단했던 것입니다.

자기연민을 지속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깨달았습니다. 자기 연민을 품는 잠깐의 시간은 위로가 될 수 있으나, 결국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어 같은 상황에 머물게 할 뿐이라는 것을 말이죠. 마찬가지로 우울증 심화의 지름길이자, 뇌를 혹사하는 과정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이후 우울증 극복을 마음 먹으면서 자기 연민을 멈추고자 했습니다. 자기 연민은 나에 대한 학대 행위일 뿐이라고, 매일 되새겼습니다. 이제 저는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과거는 힘들었을지언정 현재는 만족스럽습니다. 원하던 직업과 나만의 취미, 하루의 작은 성취들로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지금은 원가정에서 나오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살고 계시죠요즘은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나요?

작년에 남편과 혼인신고를 하고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요. 새 가정을 꾸리면서 ‘가정의 순기능’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가 아닌, 그저 존재함으로써 받는 사랑입니다. 앞으로도 사랑이 많은 가정을 꾸려나가고 싶어요.

요즘은 직접 요리를 해서 매일 밥을 차려 먹고 있어요. 생각보다 제가 요리를 좋아하더라고요. 뜨개질도 종종 하고, 평일엔 조금 지루하더라도 제 일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평일이 지루한 건 주말이 즐겁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네요(웃음). 우울증이 심할 땐 평일, 주말할 것 없이 모두 다 우울한 날들이었는데 말이죠.

물론 모든 것이 꿈동산처럼 행복하고 안락하지는 않아요. 마땅한 삶의 고통들도 겪고 있습니다. 아침 기상이 힘들고 때로는 상처받고 실수합니다.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해보자!’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게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책에서도 말했듯,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증 우울증이든, 우울질의 성향이든 분명 어떻게든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선택과 방법의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좋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아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무쪼록 잘 지내주세요! 능력을 계발하거나 가치 있는 사람이 되거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것은 오늘 하루를 잘 지내는 일입니다. 될 수 있으면 춤을 추듯이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어요. 살아내는 하루가 쌓여 좋은 미래가 올 것을 믿습니다.



*전이레

원치 않는 공부를 강제로 하며 자란 분당 키즈. 결국 연세대학교 생명공학과에 진학했으나 찬란한 대학 시절 심각한 우울증을 맞닥뜨린다. 이후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대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먹는다.

‘진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우울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롭고 즐거운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노력과 분투 끝에 우울증 완치라는 성과를 이뤘다. 살아가는 방법까지 배웠으니 우울증 수석 졸업자라고 자부한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살아내는 이야기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또한 유튜브 채널 ‘전이레’에 우울증 극복을 위한 나름의 노하우를 공유하며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인스타그램 : @jeonireh


부끄럽지 않은 우울증 극복기
부끄럽지 않은 우울증 극복기
전이레 저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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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영 “이야, 근사하게 망쳤구먼. 그래도 어제랑 다른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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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퉤퉤퉤.’

책을 쓰고, 번역을 하고, 웹드라마의 각본을 쓰기도 한 “이토록 버젓한 잡상인”(29쪽) 황국영은 자신이 내는 첫 에세이의 제목으로 이 말을 내세웠다.

글자도 특이하고, 소리도 방정맞은 『퉤퉤퉤』를 책의 제목으로 삼았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황국영은 이 말이 “생각의 브레이크이자 악셀이자 부적”이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달려나갈 때도, 뭔가를 함부로 단정해버리려고 할 때도 이 말 덕분에 멈춰 서서 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실언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서. 그래서 오늘도 가만히 말해보는 것이다. ‘퉤퉤퉤.’


자신 없는 일들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 없는 일도 하며 사는 것이 어른이잖아. 적어도 난 자신감 없는 나를 인정하고 어찌어찌 살아나갈 자신감은 있으니 최악은 아닐 거야. 그렇게 믿자.(중략) 

야, 다 괜찮을 거야.

내가 아는 너는 울면서도 뚜벅뚜벅 걷는 사람이야.””



소심하고 어설픈 사람의 ‘퉤퉤퉤’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썼다는 말씀이 흥미로웠어요. 책을 쓰면서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 어떤 걱정이었나요? 

너무 많이 걱정했어요. 일단 작가의 꿈이 있던 것도 아니고, 책을 쓸 자신이 있던 것도 아니었거든요. 나를 보여주거나 드러내는 일, 흔적을 남기는 일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도대체 내 얘기를 누가 들어줄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죠. 갑자기 진지한 얘기일 수 있는데요. 저는 세상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이름도 특이하고, 이미 작업한 것이 있어서 검색하면 나오기는 하지만요. 세상에 훌륭하지 않은 흔적을 남길 수 있겠다는 불안이 있어요. 그래서 SNS도 안 하고, 어떤 일이 들어와도 제가 투영되는 얘기는 해본 적이 없던 거예요. 별로 즐기지도 않고,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책은 모든 것이 제가 의도하고 예상했던 것과 반대로 가야 하는 것이라서, 그것이 제일 큰 걱정이었어요.

그렇다면 책이 나오고 나서 새롭게 갖게 된 마음도 있을 것 같거든요. 

책이 나온 날 편집장님과 편집자님께 사인을 부탁드렸어요. 글은 제가 썼지만 책은 두 분이 만들어주신 거니까요. 거기에 편집장님이 ‘이 모든 과정을 즐기세요’라고 써주셨어요. 제가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셨기 때문일 거예요. “안 될 것 같아요” “못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계속 했거든요. 그런 저에게 해준 말씀이어서 이것이 어른의 자세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원래 일이 터지고 나면 나 몰라라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해요.(웃음) 처음에는 ‘이거 진짜 책이 되어버렸잖아? 어쩐다?’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편집장님의 말씀을 듣고 초점을 바꿔보기로 했어요. 실제로 새로운 일을 하니까 고마운 사람들의 존재가 확 드러나더라고요.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응원을 해 주는 사람이라든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거나 축하해주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진짜 귀하고 알록달록한, 인생의 끝내주는 기념품이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퉤퉤퉤』는 나로 살아가는 것과 나로 잘 살아가는 것 사이의 압박감과 잡념이 가득한 책이거든요. 그러는 와중에 아주 유쾌하고요. 힘이 차오르는 책이에요. 누가 읽어줄지 몰라 고민하셨다고 했지만 그래도 쓰면서 어떤 책이 됐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지는 않았나요? 

어떤 책이 되었으면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못 미쳤던 것 같아요. 그저 최대한 포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퉤퉤퉤’를 말할 정도로 소심하고 어설픈 사람이니까요. 사실 사진을 찍을 때도 입술에 경련이 오는 건 잘해야 할 것 같으니까, 힘이 들어가서 그런 거예요. 동시에 나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책을 쓰면서 분명히 비겁하게 색칠하고 덧씌울 것 같더라고요. 무의식적으로 그런 부분이 들어갔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적어도 그렇게 쓰지는 말자는 의식은 하고 썼어요. 나를 보이는 대로 그냥 쓰자고요.

포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최대한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이었던 걸까요? 

그런 생각도 있었죠. 그냥 이랬어, 라고 하면 되는데 ‘너희들은 모르는 세계가 있지만 이런 결과가 나왔다’ 하는 식으로 쓰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제일 무서웠던 것이, 제 나름의 믿음을 가지고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마치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 거였는데요. 저는 전혀 그럴 능력도, 생각도 없는데 제 말투가 워낙 다정하거나 살갑지가 않아서 그대로 쓰다 보면 그렇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솔직하자는 건 원래부터 가졌던 생각이고요. 더 나아가서 겉멋을 부리거나 누구를 흉내 내고 싶진 않았던 거예요. 어차피 못했겠지만요.(웃음) 그런 게 무의식적으로 들어갈까 봐 걱정했던 것 같아요.



‘퉤퉤퉤’는 브레이크이자 악셀이자 부적

『퉤퉤퉤』라는 과감한(웃음) 제목에 대해 들려주세요. 어떻게 갖게 된 생각이에요?  

일단 책을 생각하면서 떠올린 단어는 아니고요. 진짜로 자주 쓰고 생각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책에 나의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단어였어요. 제가 뭔가 우당탕탕 살아요. 소심한데 무모하고, 아는 게 없는데 말이 많고, 전혀 깊이가 없는데 생각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어지간히 하고 사는데 그게 되게 피곤하죠. ‘퉤퉤퉤’는 그런 제가 살려고 하는 말이기도 해요. 잘못하면 잘못한 대로 뭔가를 걷어내고 싶을 때 하나의 맺음말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잘못을 했을 때 ‘내가 그런 말을 했네’ 하고 그냥 지나가면 계기가 없잖아요. 그 대신 ‘그러지 말아야지, 퉤퉤퉤’ 하고 나면 반성해야 하겠구나, 조심해야겠구나, 생각할 수 있어요. 또 제가 제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그럴 때 역시 그만 해야겠다는 식으로 ‘퉤퉤퉤’를 생각해요. 결국 이 말은 생각의 브레이크이자 악셀이자 부적 같은 느낌이에요. 나쁜 건 끊어내고 너무 빠져 있을 때는 나아가게 하고요. 이걸로 뭔가가 나아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래도 퉤퉤퉤, 하면서 반성하고 인식했다는 것에 안심하면서 불안감을 줄여가는 것 같아요.

많이 공감이 가요. 내가 나인 것이 버거울 때가 있으니까요. 

자신을 버거워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저만 그런 줄 알았거든요. 사실 책에 대한 감상을 듣기 전에는 제가 어떤 글을 썼는지도 잘 모르겠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는데요. 지금처럼 말씀해 주시니까 정말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하고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책을 낸다는 건 책을 읽은 사람들을 통해서 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야, 근사하게 망쳤구먼. 그래도 어제랑 다른 사람이야. 넌 적어도 스스로 망쳐본 사람이잖아.”(125쪽) 같은 문장도 너무 좋잖아요. LED 전구를 직접 갈다가 고생한 뒤 한 얘기였어요. 

진짜 많이 망쳐봐서 그래요.(웃음) 시도 때도 없이 망치니까요. 망친 건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요. 열심히 안 했거나 내 태도의 문제로 망쳤다면 물론 혼내야죠. 그렇지만 LED 같은 건 솔직히 처음 해보는 일이고요. 돈을 주고 교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해보려고 한 일이었어요. 망친다 해도 밑져야 본전인 일이었죠. 그러면서 사실은 자주 망쳐봐도 괜찮을 때가 있다는 걸 조금은 눈치 챈 것 같아요. 망쳐도 별일 안 생긴다는 걸 다년 간의 망침을 통해서 알게 된 거죠.(웃음) 그리고 어차피 고생했는데 망쳤다고 스스로 구박해서 뭐하겠어요. 더구나 해봤다가 망치면 나는 다시는 이걸 할 엄두는 안 내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되게 소심한데 묘하게 긍정적인 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망치기 싫어서 시도도 안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저는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으면 저 혼자 해보고 망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한테 기대하는 게 별로 없어요. 네가 뭐 얼마나 잘하겠냐 그냥 한번 해봐라, 이 정도 수준인데요. 다른 사람들이 얽힌 일이면 망칠까 봐 무서워지기 때문에 도망을 가기도 해요.

사실 알고 보면 남다르게 단단한 면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랬으면 정말 좋겠어요. 워낙 소심하고, 많이 지치고, 그래서 많이 피곤하기는 한데요. 쉽게 우울해지거나 비관적이 되지는 않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단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저를 끌고 가면서 어떻게 하면 나라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나와 사는 노하우를 익혀가는 중 

자신의 단점을 잘 파악하는 것도 작가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어요. 습관이 되지 못한 상식들을 입력시키는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고도 쓰셨잖아요. 그 부분도 인상적이었거든요. 일단은 나에게 어떤 상식이 없는지 알아야 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계속 의식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사실 모르는 게 더 많을 거예요. 다만 진짜 몰상식하면 티가 나잖아요. 내가 알아챌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알아챌 수도 있겠죠. 어쨌든 그렇게 눈치챈 것들 중에서 만만한 것들은 해볼 만하지 않나, 생각해요. 저는 딱히 꿈도 없고 목표도 없는 사람이긴 한데요. 알면서 안 고치는 것도 생각보다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결국 다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긴 해요. 기본적으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위로가 없으면 무서우니까요.

그 역시 나를 돌보는 행위일 수 있겠군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하여튼 저를 안심시키고 진정시키는 데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쓰는 것 같고요. 저를 좀 재미있게 살게 하려고 애쓰는데 실제로 재미있게 살려면 일단 안정이 돼야 하니까요. 그러려면 불안정한 저의 마음을 잘 달래야 해서 저랑 사는 노하우를 익혀가고 있나 봐요.

예를 들어 의자 잘 넣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 밖에 열심히 하는 것 있으세요?

의자 잘 넣기 역시 참 오랜 시간 의식을 안 하고 살았던 일이에요. 아직도 적응 기간이라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하지 못하기도 해서요. 그것이 현재 저의 주요 프로젝트예요.

한 가지 더 있다면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예요. 요즘 번역하는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서 하게 된 생각인데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듣는 건 정확히는 듣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이 실은 상대의 이야기를 내 말의 땔감으로 쓰는 것일 때가 많다는 것,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것이라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해가 안 되거나 생각이 다르더라도 일단은 그냥 들어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죠. 진짜 멋있는 건 그렇구나, 하고 다 들어주는 것 같아요.

프리랜서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얘기해볼까요. 작가님은 스스로를 “재미와 자유에 묶여 사는 노예”(25쪽)라고 말해요.  

저는 진짜 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일정을 정말 열심히 짜는데요. 그게 남들 보기에는 일을 잘하려고 하는 것 같겠지만, 저는 그 외의 시간에 최대한 자유롭고 싶어서 그러는 거거든요. 제가 하는 일이 자유와 재미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할 만해지기도 하고요. 실제로 그걸 위해서 일하는 것 같기도 해요. 프리랜서는 표면적인 자유는 너무 많아요. 그런데 그건 진짜 표면적인 자유라서요. 진짜 자유를 얻으려면 표면적인 자유는 어느 정도 통제를 해야 한다는 경험적 결과가 나오기도 했어요.



꿈은 같이 술 한 잔 마셔보고 싶은 할머니 

자유야말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걸 언제 알게 되신 거예요? 

역설적이게도 제가 자유에 굶주려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어요. 사람들이 여행을 가서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많이 봐요. 그런데 저는 부모님과 살면서도 무척 자유로웠었나 봐요. 저를 여행지처럼 다른 곳에 내놓는다고 특별히 자유로워지지 않더라고요. 그렇다는 건 내가 지금껏 크게 자유를 억압당하며 살지 않았던 거고, 때문에 이게 조금만 억압되면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라도 나에게는 큰일처럼 느껴지는구나, 알게 됐어요.

10대나 20대 때 다른 친구들은 엄마, 아빠 없으면 이런 걸 하고 싶다거나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요. 저는 그런 게 정말 없었거든요. 제약으로 느끼는 조건들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생각보다 자유를 잘 누리고 살았구나, 그래서 이게 억압되면 숨 막히겠구나, 생각을 했던 거죠. 한번은 일정이 많이 잡히면 왜 힘든지 생각해 봤어요. 사람들 만나는 걸 어려워하거나 딱히 체력이 약하지도 않은데 말이에요. 결국 그만큼의 시간 동안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유롭기 위해서 자유를 통제하면서 지내고 있어요.(웃음)

출퇴근을 의식하기 위해 집에서 일을 하면서도 잠옷에서 출근복으로 갈아입는 일을 애써 하시는 이유도 그 맥락이겠어요. 

맞아요, 저는 마인드만으로는 안 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자극을 줘야만 해요. 진짜 저를 6살짜리 조카라고 생각하고 사는데요. 이 애는 내가 옷을 입혀야 정신을 차린다, 세수를 해야 잠이 깬다,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제 6살 조카들은 훨씬 저보다 성숙하지만요. 그래서 스케줄대로 밥 먹으라는 시간에 먹고, 세탁하라는 시간에 계획을 지키고, 놀 때는 기분 좋게 놀죠. 그런 하루를 보내면 잠잘 때 ‘녀석 기특하구나’(웃음) 싶어지는데요. 그런 재미와 자유의 순간을 만들려고 나머지 하루를 계획하는 것 같아요. 저한테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 거죠. 그래서 자잘한 계획을 많이 세우는 거예요. 칭찬받을 일을 많이 만드는 거예요. 그럼 밥 제때 먹은 것으로도 칭찬받을 수 있거든요.  

프리랜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노동으로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많은 것 같거든요.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가 곧 나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작가님의 글에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이기도 했어요. 여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노동으로 나를 설명하는 건 약간 오늘 먹은 식단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처럼 저에게는 느껴져요. 오늘 입은 옷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책임감 같은 면에서는 분명히 의미가 더 크겠지만요. 저한테는 그 자체가 주는 의미는 비슷한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문제는 제가 한 가지를 깊숙하게 하지 못하다 보니까 일로 나를 설명하려면 진짜 너무 번거롭고 구차하고 얇고 넓어져서요. 결국 설명할 수가 없게 돼 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일을 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일이 그것이 나의 하루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어떤 게 재미있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신 거죠.

그런 것도 같고요. 그냥 각각을 저의 일부, 조각들로 생각하고 있어요. 직업도 분명히 저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는 한데요. 그게 곧 나인가, 생각하면 잘 모르겠는 거죠.

같이 술 한 잔 마셔보고 싶은 할머니를 대외적인 꿈이라고 공표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꿈이에요. 

진짜 큰 이야기를 한 건데 사람들이 모르더라고요.(웃음) 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꿈을 얘기한 건지 말이에요. 진짜 욕심 낸 꿈이거든요. 저는 진짜 멋있고 매력적인 사람을 보면 ‘와, 저 사람이랑 술 한 잔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술이 중요하다기보다 그렇게 편안한 자리에서 얘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사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그것도 나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과 한번 놀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더 어려울 거예요. 그것이 굉장한 기대와 설렘과 호감이 담긴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고요. 그걸 꿈으로 삼은 거죠.

실제로 그러려면 술 사줄 여유도 있어야 할 거고, 경험도 많아야 하고, 좋은 가게도 알아야 하고, 건강도 해야 하고, 마주 앉은 사람에게 지지 않을 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러면서 동시에 저도 재미있어야 하니까 새롭고 낯선 사람들의 얘기에 꾸준히 호기심도 갖고 있어야 하고, 그들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지식도 있어야 하죠. 이건 정말 원대한 꿈이에요.



*황국영

정체성이 모호한 것이 유일한 정체성 같다. 활동성 높은 집순이. 낯가림을 경험한 적 없는 내향형 인간. 게으르게 살 궁리를 하느라 바쁜 생활인. 안정 추구형 모험가. 취미는 취미 찾기, 특기는 아직 찾는 중이다. 

혼자로도 거뜬히 풍요로우면서 함께일 땐 더 넉넉한 ‘어엿한 1인자’가 되고자 어설픈 설계도를 가지고 우당탕탕 나를 조립해 나가는 과정을 이 책에 담았다. 사소한 일에 너무 오래 허우적대지 않도록, 도망치지 않을 만큼만 단단하도록. 완벽하지 않은 날에도 조금만 더 포근한 마음과 근사한 태도로 살아 낼 수 있길 기대하며 혼잣말처럼 ‘퉤퉤퉤’의 주문을 왼다.

말과 글을 짓고 옮기는 일을 한다. 『미식가를 위한 일본어 안내서』, 『クイズ化するテレビ T V, 퀴즈가 되다』를 출간했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외국어 공부의 감각』, 『어떡하지? 이럴 때 펼쳐보는 그림 사전』 등을 옮겼다. 원서 함께 읽기 클래스 <아소비고코로스 @asobi_gokoros〉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예술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했고, 일본 와세다대학원에서 표상 미디어론을 공부했다. 기획자 및 문화 마케터로 활동하다 책과 이야기에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TV, 퀴즈가 되다』(クイズ化するテレビ)를 출간했고, 아이디어 북 『MY BIG DATA』를 기획했다. 웹드라마 「게임회사 여직원들」 「오! 반지하 여신들이여」의 각본을 썼으며 『그렇게 어른이 된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오늘도 중심은 나에게 둔다』 『외국어 공부의 감각』 『오랫동안 내가 싫었습니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퉤퉤퉤
퉤퉤퉤
황국영 저
책사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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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쓰홍 “좌절과 실패의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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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vin Chen


“줄곧 ‘귀신’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귀문(鬼門)이 열리고 귀신들이 출몰하는 대만의 음력 7월 ‘중원절’, 천 씨 집안의 막내아들 톈홍이 고향 용징에 돌아온다. 문명이 있는 대도시와 달리, 황량함만이 남은 마을 ‘용징’. 그곳에는 사연을 품고 죽은 귀신들과 흉흉한 소문들, 사람들의 비밀이 떠돈다. 이 귀기어린 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설 『귀신들의 땅』은 근현대사의 폭력을 통과하는 천 씨 일가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사람과 귀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소설가 천쓰홍은 줄곧 가족을 소재로 삼았지만, 고향의 이야기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서른세 살에 시작해 10년이 지난 마흔 세 살에 끝났다. 용징에서 한 농가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나 고향을 떠난 그에게 고향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였고, 수많은 귀신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쓴 끝에 용징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었다. 대만 최고의 양대 문학상인 금장상 문학도서부문상과 금전상 연도백만대상을 수상하며 대만의 젊은 거장으로 떠오른 천쓰홍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사라지지 않은 과거를 직시하는 일

『귀신들의 땅』 한국어판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소설을 쓴 뒤 작가님의 근황과, 한국어판을 받아보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저의 거주지인 독일 베를린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에 『귀신들의 땅』한국어판을 받았습니다. 그날 저는 타이베이에서 팟캐스트 녹화를 하고 있었는데 출판사 편집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녹화 현장으로 달려와 제게 『귀신들의 땅』한국어판 두 권을 건네주고 갔습니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제 책인데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호기심 가득한 고양이처럼 마구 책장을 넘겨봤습니다. 마음속으로 표지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이 한국 서점의 매대에 진열되어 있으면 얼른 집어 들고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몇 시간 뒤에 저는 타오위안(桃園) 공항 게이트 앞에서 독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자신을 상대로 내기를 했습니다. 1분 내에 지상근무 요원들이 보딩 시작 안내방송을 한다면 핸드폰으로 『귀신들의 땅』한국어판의 사진을 찍어서 서울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보내기로 한 것이지요. 그에게 “이봐, 내 소설이 한국에서 출판됐어.”라고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20년 넘게 만나지 못했습니다. 청춘 시기에 짧게 찾아왔던 여름날의 들뜬 연정이었지요. 당시 이별을 고하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한국에 오게 되면 날 찾아줘, 알았지?” 저는 한 번도 한국에 그를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20년이 지나 저의 책이 저보다 먼저 한국에 가게 되었네요.

지금은 독일에서 이 답변서를 쓰고 있는데 그가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서울에서 제 소설을 사서 방금 다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울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또 자기 딸에게도 이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하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작가와 아는 사이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작가의 말에 “줄곧 ‘귀신’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밝히신 것처럼, 소설은 귀신이 떠도는 땅, 용징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시작된 소설인가요?

초등학교 다닐 때 반 친구들 모두가 돌아가면서 교단에 올라가 자기 가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저는 누나가 일곱이고 형이 하나 있으며 나는 아홉째 막내라고 했지요. 한순간에 반 전체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제가 무슨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외계인이나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저희 집 가족구성이 꽤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집들은 아이가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았던 겁니다.

성인이 되어 글을 쓰면서 줄곧 제 가정을 원본으로 삼긴 했지만 고향인 용징에 관한 소설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제 가족은 구성원이 정말 많았고, 드라마틱한 사건도 너무 많았습니다. 아주 요란하고 시끄러웠지요. 저는 서른세 살이 되던 해부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만 아직 풋내기라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탓인지 몇만 자 쓰다가 중단하고 한쪽으로 치워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감히 성숙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훨씬 더 많고 다양한 아픔을 겪고 나서야 다시 이 소설로 돌아오게 되었지요. 이번에는 모든 귀신들이 전부 돌아와서 절대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마흔세 살이 되던 해애 마침내 이 귀신들의 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귀신들의 그림자들이 떠도는 중원절* 용징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습니다. 작가님은 “줄곧 용징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오히려 끊임없이 용징을 쓰고 있었다”고 하셨어요. 고향 용징을 소설로 쓰는 것은 어떤 일이었나요? 

(*타이완에서는 음력 7월 15일을 중원절로 정하고
귀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절을 올려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저는 고향에 관한 이 소설을 독일 베를린에서 완성했습니다. 제가 아직 용징에 있었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했을 겁니다. 용징은 전형적인 타이완 중부의 소도시로, 상당히 보수적이고 소박하며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곳입니다. 이런 시골 공간은 절대로 저의 생존을 위한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박물관이 필요하고 미술관과 영화관, 대형 서점, 국제 영화제, 극장, 음악회가 필요했는데 용징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물론 제 성적 취향이 주된 원인이었지요. 저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시골의 대인관계 속에서는 자유로운 공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용징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사실 음혼(陰魂)들이 사라지지 않는 과거를 직시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고향을 떠나 타이베이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일로 이주했지만 고향은 계속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아무리 도망쳐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 소설을 쓴 건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문학 속에서 귀향하여 과거의 유혼(幽魂)들을 똑바로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리(距離)가 이기(利器)였습니다. 고향과 바다를 사이에 둔 대륙에서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아무런 구속도 없었으니까요.

소설은 한 사람의 초점화자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각 장마다 인물 각각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천씨 가족은 물론, T의 어머니, 심지어 귀신까지 목소리를 부여받습니다. 이런 서술 방식을 택하신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저는 모든 소설가들이 서사의 각도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수많은 몸부림을 경험한다고 믿습니다. 1인칭 서사로 해야 할지 아니면 3인칭으로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게 되지요. 『귀신들의 땅』에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사람도 있고 귀신도 있지요. 저는 줄곧 편안한 서사의 각도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가족들과 한데 둘러 앉아 식사를 하면서 화제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로 모였고, 어머니 생전의 한 가지 일에 관해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각기 다른 기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어떤 누나가 당시 어머니의 어떤 행동을 얘기하자 또 다른 누나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다며 재빨리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이어가다가 마침내 말다툼 직전까지 이르렀지요. 저는 누나들의 말다툼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안(李安) 감독의 영화 <음식남녀>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타이완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종종 이처럼 애증이 교차합니다.(한국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저는 『귀신들의 땅』의 서사 각도를 찾았습니다. 저는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배역에 각자의 편을 할애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간에 모든 배역에게 자신들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야 했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저는 이 소설이 끊임없이 시각과 서사의 각도를 바꾸고 있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독자들의 인내심을 믿습니다. 저에게 약간의 인내심만 허락해 주신다면 책 속의 수수께끼들을 전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독자들이 이 점을 발견했을지 모르겠군요. 이 책 속에는 사람과 귀신의 서술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3인칭 서술은 전부 사람들이 말이고 귀신들의 배역이 등장할 때면 1인칭 서사 각도로 바뀝니다.

‘고향을 떠난 자가 고향에 돌아온다’는 플롯은 근대 및 산업화 시기 한국소설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주제라 흥미로웠습니다. 그중 많은 한국소설들은 낙후된 고향을 바라보는 남성 지식인 중심의 시각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작가님은 톈홍을 중심으로 하는 ‘고향에 돌아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보고 싶으셨나요? 

천쓰홍이 고향을 떠난 것은 사실 실패와 모반에 따른 도주였습니다. 남들은 고향을 떠나면 큰돈을 벌거나 벼락 출세를 하여 피폐해진 고향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큰 승리를 선포하곤 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왕씨 집안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귀향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애당초 갈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천쓰홍은 독일에서 감옥에 갇혔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려다보는 각도에서 고향을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지요.

제게는 실패자의 이야기가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주인공의 귀향은 빛나는 금의환향이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돌아와 과거의 유혼들을 마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처럼 망가진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습니다. 저 자신도 망가진 작가이거든요. 영광스러운 귀향은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망가진 배역, 온몸이 상처인 인물이 고향으로 돌아와야 유감의 매력이 가득할 수 있지요.

저는 용징을 배경으로 『귀신들의 땅』을 써서 여러 나라에서 출판했고 타이완에서 큰 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용징 전체를 통틀어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아마 열 명도 넘지 않을 겁니다.(그 중 세 명은 제 누나나 친척일 겁니다) 저 자신을 평가 절하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낙후된 고향을 관망할’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의 고향은 타이완의 부호들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용징을 떠나 중국 대륙에 가서 컵라면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자본시장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둔 것이지요. 용징으로 돌아온 그들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대형 물체가 있어야 제대로 부를 과시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겨우 썩 잘 팔리지 않는 책을 몇 권 썼을 뿐이지요. 책은 빛나는 물체는 아닙니다. 이는 제가 오래전에 예기했던 좌절이자 실패입니다.

하지만 저는 좌절이나 실패에 개의치 않습니다. 실패는 제게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체험하게 해주거든요.

저는 계속 소설을 쓸 겁니다. 좌절과 실패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갈 것입니다.


ⓒKevin Chen


누구나 실컷 울 필요가 있다

소설의 시간이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차적 구성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인물들의 기억을 풀어내는데요. 실제로 어떻게 써 내려가셨는지 궁금합니다.

제 소설은 줄곧 고무지우개를 들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지워나가는 작업이었습니다.

방금 충전기 선을 찾다가 서랍에서 아이폰 선(신제품인지 구제품인지는 모르겠습니다)과 C타입 선, USB선, 기타 각종 전자제품 선이 마구 뒤섞여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애써 긴 시간을 들여 찾았지만 제가 찾고 있는 선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선들은 시간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미래가 한데 뒤엉켜 있지요. 저는 『귀신들의 땅』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도약할 능력에 대한 도전을 제공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 사이를 오가는 도전이지요. 아마도 저의 이러한 서사법은 독자들을 몹시 피곤하게 할 겁니다. 그래서 제 독자들은 아주 적습니다. 계속 이렇게 쓰면 독자들이 아주 싫어하는 작가가 되겠지요.

천씨 가문의 인물들은 폭력과 억압의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서로에게 폭력을 저지르기도 하는데요. 소설을 읽다 보면, 인물들의 비밀을 통해 누구도 이 억압의 세계에서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임이 드러납니다. 작가님은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고 싶으셨나요? 

『귀신들의 땅』은 전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긴 시간대의 타이완 농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압력은 변해 왔지만 시골은 여전히 미신으로 가득한 가부장 사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부장 사회를 묘사하다 보면 정말로 폭력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가부장제의 압력은 대부분 폭력을 수단으로 하지요. 여기에는 신체에 대한 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다 포함됩니다. 폭력은 권력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방법입니다. 폭력의 행사는 상대에게 신체적 자유를 갖지 못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상대의 신체를 소유하고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이지요. 물론 권위주의 시대에는 폭력이 인민들의 반항과 도발을 통제하는 국가적 수단이었습니다. 국가나 정부와 뜻을 달리하는 목소리는 전부 철저하게 소멸해야만 정부는 신속하게 표면적으로 조화를 실현하고 권력자가 바라는 평화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권력자의 평화가 타자에게는 참극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문학에서 독자에게 열독을 강요하는 폭력은 사실 폭력을 추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방법을 강구하여 폭력의 본질을 제거해야 반격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작가님에게 기억이란 후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설은 여러 가지 후각의 묘사로 가득합니다. 청초고 냄새, 양타오탕과 같은 음식 냄새, 벌꿀사탕 냄새 등 작가님의 소설에서 후각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매일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는 어느 유튜버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영상을 찍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예컨대 서울에 가서 매운 라면을 한 그릇 먹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영상을 중거물로 찍어두지 않으면, 나중에 뭘 먹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저는 자신은 어떤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도 영상에 근거하여 기억을 검색해야 할까요?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에 관해 묘사하면서 미각을 통해 기억을 소환해 냅니다. 이런 식으로 유년의 기억이 영원한 거작으로 탄생하게 되었지요. 저는 그 유튜버의 말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기억법을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촬영 기구를 전부 내려놓고 감각기관을 최대한 개방한 다음,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으면서 진지하게 눈앞에 놓인 그 라면을 먹는 겁니다. 그러면 미각과 후각이 우리의 뇌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그 라면의 맛을 기억하는데, 굳이 영상이라는 증거물이 필요치 않게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수백만 명이 일일이 확인해 줘야 진실이 존재한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노인들이나 하겠지요. 제가 정말로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저는 지나간 세월에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항상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고 있고, 앞서가는 시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편이지요. 그래도 정말 좋습니다. 자신을 좀 더 천천히 지나가게 하고 시간을 붙잡아두는 겁니다. 천천히 책을 읽으면서 길을 가다가 영화관에서 네 시간짜리 유럽 영화를 한 편 보면 되니까요.

양타오탕이나 청초고는 전부 지나간 시대의 맛과 냄새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냄새를 맡으면 어김없이 유년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후각은 시간의 마술입니다. 확실히 냄새를 맡으면 과거의 자신이 되돌아옵니다.

톈홍과 그의 연인 T는 베를린에서 세상 어디에도 ‘집이 없는 기분(heimatlos)’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감각은 소설의 등장인물 모두가 공유하는 감각 같기도 합니다. 현재 고향을 떠나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으신 작가님은 진정한 고향을 잃어버린 듯한 이 감정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제가 받은 교육에는 국민당이 ‘집을 잃은’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당권자들은 강제로 중국에서 쫓겨나서 타이완에 와서는, 패전자의 신분으로 중국에 가본 적도 없는 우리 타이완의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집 잃은 설움과 눈물을 함께 받아들이도록 억압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의 땅』을 쓰면서 걱정했지요. 저의 ‘집 잃은’ 사람의 서사가 독자들로부터 공명을 얻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저의 용징과 저의 유년, 저의 도망이 도대체 이 세상과 어떤 관계로 얽힐 수 있을까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글을 써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문제들은 상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선 쓴 다음에 생각하기로 한 것이지요.

책이 출판되자 제 걱정이 과도했다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쓴 ‘집 잃은’ 서사의 뜻은 역사적 사실과 잘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디에 있든 진정한 안정을 찾기 어렵습니다. 몸과 마음이 이리저리 떠돌아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더 분명해지지요. 귀신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귀신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한 자세로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사람도 사람이 아니고 귀신도 귀신이 아닌, 영원히 ‘집 잃은’ 상태이지만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연기이고 모든 것이 허점인 것입니다.

소설에는 인상적인 ‘울음’의 장면들이 있습니다. 특히 발트해의 작은 마을 라뵈에서 톈홍이 우는 큰 울음은 용징과 타이페이, 베를린 어디에서도 억압과 폭력을 감내하던 톈홍이 자신을 드러내는 울음 같았습니다. “줄곧 ‘울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 장면을 쓸 때 어떤 기분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울기를 잘하는 귀신입니다. 최근에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를 보면서 눈에 봄비가 내렸습니다. 마침 승무원들이 기내식을 제공하던 참이라 제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란 눈으로 “닭고기 드시겠어요, 아니면 소고기를 드시겠어요(Chicken or beef)?”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먼저 그 영화를 꼭 보라고 추천하고 나서, 소고기로 달라고 말했지요. 기내식을 먹으면서도 저는 계속 영화를 봤습니다. 계속 눈물을 쏟았지요.

저는 우리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이 시대를 살면서 모두가 AI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더더욱 대담하게 울 필요가 있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저는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기분 좋게 실컷 울었던 게 언제였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적당하게 운다는 건 신체의 해방에 절대적으로 건강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좀 슬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요. 눈물은 피부를 아주 매끄럽게 해주기도 합니다. 굳이 AI를 찾아 우리 대신 울어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요? 울어야 하고 울고 싶을 때는 옆에 사람이 있든 없든 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울었던 건 타이베이의 지하철 안에서였습니다.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다가 참지 못하고 울어버린 거였습니다. 객차 안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어느 부인이 샤넬 핸드백에서 티슈를 한 장 꺼내 제게 건네주고는 곧장 지하철에서 내리더군요. 저는 티슈를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울면서 지하철에서 내려 잠시 타이베이 거리를 산책했더니 몸이 가벼워지면서 기분이 아주 좋아지더군요.

발트해에서 우는 대목을 쓸 때 저는 정말로 엄동설한의 발트해에 가 있었습니다. 해변에 아주 오래 앉아 있었지요. 먼바다 수면 위에 하얀 점들이 무수히 떠 있었습니다. 물결 속의 별무리 같았지요. 그 하얀 점들이 서서히 해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알고 보니 야생 백조들이었어요. 뭍에 오른 백조들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면서 침입자인 저를 아랑곳하지 않고 제 옆에 아무렇지 않게 앉더군요. 밤이 되자 백조들은 모래밭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한 무리 순백의 야생 백조들에게 둘러싸인 저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또 울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눈에서 나오자마자 얼음으로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차가웠습니다. 그 상태로 몇 분만 더 있다가는 체온을 잃고 동사할 것만 같더군요. 저는 몸을 일으켜 아름다운 백조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고마워. 너희들을 내 소설에 넣어줄게. 내 소설을 사서 읽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상관없어. 너희들은 이 소설의 아주 중요한 핵심 배역이야.”

이 책을 기꺼이 출판해준 한국 출판사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어판 역자와 그 아름다운 백조 무리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번역: 김태성



*천쓰홍

타이완 소설가이자 영화배우, 번역가.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1976년 타이완 융징향(永靖鄕)에서 한 농가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푸런(輔仁) 대학 영문과와 국립 타이완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독자와 평론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현재 타이완 문단의 중심에 떠오른 작가로, 임영상(林榮三) 단편소설상과 구거(九歌) 출판사 연도소설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귀신들의 땅』으로 타이완 최고의 양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금장상(金鼎賞) 문학부문상과 금전상(金典賞) 연도백만대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반역의 베를린』 『베를린은 계속 반역중이다』 『아홉 번째 몸』과 소설 『손톱에 꽃이 피는 세대』 『영화귀도(營火鬼道)』 『태도』 『변신의 플로리다』 『알러지를 제거하는 세 가지 방법』 등을 출간했다. 『귀신들의 땅』은 12개 언어로 출간되었고, 《뉴욕타임스》 《라이브러리 저널》 《르몽드》 《마이니치신문》 등에서 격찬받았다.


귀신들의 땅
귀신들의 땅
천쓰홍 저 | 김태성 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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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주 채널예스 선정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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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어떤 책이 나왔나 궁금하다면?
매주 월요일, 채널예스가 선정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소설)

정보라 저 | 래빗홀

문어, 대게, 상어… 해양 생물의 이름으로 된 목차의 제목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동자의 생존권, 장애인 이동권, 21세기 제국주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등 현실 문제를 결국 ‘사랑’으로 풀어나가는 정보라 작가의 SF 연작 소설.




『전기, 밀양 - 서울』 (사회정치)

김영희 저 | 교육공동체벗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이 시작된 지 19년이 흘렀고, 결국 건설은 강행되었다. 누군가는 끝난 싸움, 진 싸움으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아직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탈핵’ 이슈를 주요 의제로 등장시킨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의미와 그 안에서 피어난 ‘할매’들의 여성 연대를 조명한 책.




『생각보다 잘 자랐습니다』 1, 2 (만화)

핑크복어 글/그림 | 테라스북

가정 폭력을 대물림받은 두 남매의 이야기를 담은 웹툰 단행본.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정면으로 대립하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 누나 핑크 복어와, 가족들의 멘탈을 관리하면서도 중심을 지키는 힐러 동생 브로의 삶을 통해 상처 입은 수많은 어른과 어린이에게 ‘생각보다 잘 자랐다’, ‘생각보다 잘 자랄 것’이라고 위로를 전한다.




『언니가 내게 안아봐도 되냐고 물었다』 (인문)

카일리 레디 저/이윤정 역 | 까치

어느 날 조현병 환자인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다. 의료 사회복지사인 카일리 레디는 실종된 언니의 삶을 돌아보며 조현병을 다각도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소개하고,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진솔하게 풀어나간다.




『진정한 친구가 되는 법』 (유아)

박현민 글/그림 | 창비

인간은 다른 존재와 공존할 수 있을까? 예티 연구소 소장 유진은 예티를 인간의 친구로 만들기 위해 미끼를 놓고 함정에 빠트린다. 자연을 친구라고 말하면서, 함부로 대상화하고 길들이려는 인간의 모순적인 욕망을 블랙 코미디로 그려낸 독창적인 색감의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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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어떻게 도서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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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 SF 칼럼니스트가 일상에서 벗어난 딴생각을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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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말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맛있는 가게를 많이 알 수 있어?”

요시나가 후미의 자전적 만화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의 대사다. 이 말에 주인공은 정색하며 답한다. “나는 말이지. 일하고, 잘 때 빼고는 거의 46시간 동안 먹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 아니, 일에 따라서는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먹는 것을 생각하지. 내가 이만큼 음식에 인생을 바쳐왔으니 음식도 나한테 조금은 뭔가 보답해줘야 하지 않겠어?” 이 장면은 내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하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지식이 쌓인다. 아무 생각 없이 갑자기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의 데이터베이스는 그 사람의 삶으로 다져지는 것이다. 그리고 둘,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에는 보답이 있다. 설령 대상이 무생물이라도 마음을 쏟는 일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일방적인 헌신이 아니라 상호 교류가 일어나는 사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애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은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일은 어떨까? 나는 답을 안다. 조 월튼의 『타인들 속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책을 충분히 사랑하면, 책들도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 책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주인공 ‘모리’는 소설 후반부에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마녀, 그녀의 어머니와 최후의 결전을 치른다. 마법을 사용하는 싸움이다. 상대는 책을 마구 찢어 종이를 창으로 만든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창이 날아든다. 모리는 창이 된 종이를 무엇으로 바꿔야 반격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종이는 나무에서 나온다.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나무는 나무이고 싶어 한다. “창들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었고,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와 가시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마가목과 전나무로 변했고, 다 자라 잎이 무성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었다. 이윽고 나무들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무였다가 종이가 되고 책이 되었던 그 존재들은 자신에게 다시 뿌리를 부여한 주인공을 위해 움직인다. 사랑은 도처에 있다.

모리가 책을 사랑하게 되는 배경은 도서관이다. 도서관에 다니기 전에도 모리는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소녀였지만, 도서관이야말로 책을 ‘충분히’ 사랑하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모리처럼 돈이 없는 청소년이라도 도서관에선 책을 원하는 만큼 잔뜩 읽을 수 있다. 원하는 책이 없다면 희망도서 구입 신청을 할 수 있다. 혹은 다른 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찾아볼 수도 있다. SF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주인공은 진심으로 감격한다. “도서관 상호연계 대출은 세상의 기적이고 문명의 위업이다. / 도서관은 모두 정말로 멋지다. 정말 도서관이 서점보다 낫다. 서점은 책을 팔아 수익을 내지만, 도서관은 그냥 자기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순수하게 선의에서 조용히 책을 빌려준다.” 마침내 모리는 어디에 가든 자신이 도서관에 속하리라고 생각한다. 읍내의 작은 도서관이라도 다른 도서관과 연계해서 책을 제공한다.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면 심지어 다른 행성에서도 모리는 소속감을 느낄 것이다. 그곳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공격당해 쌍둥이 자매를 잃고 다리를 절게 된 모리가 다시금 세상과 연결되는 장소다.

저자인 조 월튼 역시 도서관을 사랑한다. 그녀는 ‘도서관의 즐거움’이라는 헌사를 썼다. “모든 책에는, 아무리 사랑받았던 책이라도, 끝이 있기 마련이므로, 나는 또 다른 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생에 걸쳐 나는 늘 즐거움을 찾아 책을 읽었다. 도서관은 변함없는 친구였다. 내가 열두 살에 처음 모험을 했을 때, 나는 읽어야 할 모든 책이 무료로 꽂힌 책 선반을 발견했다. A부터 Z까지 편리하게 정리된, 좋은 상태의, 새것과 오래된 것, 양장본으로 된 것들을. 내가 사랑한 많은 책을 나중에 소유하게 되긴 했지만, 도서관 독서는 내게 기회를 주었다.” SF와 판타지를 쓴 여러 작가가 도서관에서 기회를 얻었다. 케이트 윌헬름은 가정주부로 지내다 도서관 덕분에 작가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한나 렌은 어릴 적 시민도서관에서 읽은 SF 문고를 통해 SF를 사랑하게 되었다. 존 스칼지는 도서관에 감사하는 의미로 지역 도서관에 익명으로 기부할 기금을 마련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예 도서관에서 글을 썼다. 『화씨 451』의 작가 후기에는 그가 도서관에서 책을 쓴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당시 나는 1941년부터 쭉 거의 대부분의 집필 활동을 집 차고에서 했다. (…) 아이들은 창가로 떼 지어 몰려와선 노래를 부르거나 창문을 두드려 댔다. 그러면 난 쓰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든지 딸들과 놀아 주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내가 아이들과 놀기로 한다면 가계 수입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별도의 집필 사무실이 필요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 마침내 나는 UCLA 도서관의 지하에서 마침맞은 공간을 찾아냈다. 거기엔 구식 레밍턴 아니면 언더우드 타자기가 20여 개쯤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다임 하나를 내면 30분간 그 타자기를 빌려 쓸 수 있었다. 동전을 넣는 순간부터 시곗바늘은 미친 듯이 째깍거리며 가고, 나는 30분이 차기 전에 글을 마치려고 마구 타자기를 두드려 댔다. 그러니까 당시에 난 이중으로 내몰렸던 셈이다.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집필할 때는 타자기 사용 시간으로부터.”

도서관에 관해 읽다 보면 랑가나단의 도서관학 5법칙을 만나게 된다. S. R. 랑가나단은 도서관이 지켜야 할 5가지 대원칙을 발표했다. 강민선의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를 보면 저자는 사서로서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이 책은 실용서가 아니라 에세이다). 현실의 도서관에는 돈 문제, 사내 정치, 소소한 비리, 치사한 노동 환경, 진상 민원이 있다. 그래도 랑가나단이 주장한 5법칙은 매우 자명하고 아름답다.


1법칙. 모든 도서는 이용을 위한 것이다. (Books are for use.)

2법칙. 도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Books are for all.)

3법칙. 도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Every book its reader.)

4법칙. 이용자의 시간을 절약하라. (Save the time of the reader.)

5법칙.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이다. (A library is a growing organism.)


도서관이 자료를 보존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제공하기 위해서다. 언젠가 이루어질 만남을 위해 도서관은 세상의 온갖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고 보관한다. 그것이 도서관이 창고와 다른 점이다. 도서관의 의의는 사람들이 자료를 열람할 때 살아난다. 책은 독자에게 읽힐 때 생명을 얻고, 그런 순간을 위해 도서관은 생동하는 유기체로 존재한다. 내가 꼭 가보고 싶은 도서관은 예일 대학교에 있는 ‘바이네케 희귀본과 필사본 도서관’이다. 『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의 소개에 따르면 그곳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 직사광선 때문에 자료가 손상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벽면이 무척 얇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낮에는 햇빛이 은근하게 비친다. 저녁에는 반대로 내부 조명이 비쳐 건물 자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은은한 빛으로 어슴푸레하게 유지되는, 종이가 최대한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공간이다. 그런 곳마저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누구나 그곳을 구경하고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자신을 열어주는 곳이라니. 도서관은 그야말로 박애의 장소다.

도서관이 당신을 충분히 사랑하면, 당신도 도서관을 사랑하게 될까? 영화 <투모로우>에서 주인공 일행은 해일을 피해 뉴욕 공립 도서관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도서관의 책을 태워 몸을 녹인다. 또한 의학서를 읽고 패혈증을 치료할 방법을 배운다. 사서 한 명은 희귀도서인 구텐베르크 성경을 끌어안으며 이 책 하나만은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책은 인류가 형성해온 문명의 상징이자, 도서관이 지켜온 사랑의 상징이다. 원칙에 따라 도서관은 이용자가 누구든 잘 보존된 책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무료로 제공한다. 도서관은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보답할 일이 남았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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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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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의 추천사] 싱어송,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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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를 싱어송, 라이터로 끊어 읽고야 마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가수이면서 곡도 쓰는 재능 많은 이를 일컫는 말인 싱어송라이터는 Singer와 Songwriter를 합친 단어이므로 싱어, 송라이터로 끊어 읽어야 올바르다. 싱어송, 라이터라고 읽는다면 이 단어는 청유형의 문장으로 변한다. Sing a song, writer. 노래해라, 작가여. 이렇게 발음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카펜터스의 유명한 노래 <Sing>의 첫 소절을 흥얼거리게 된다. 싱- 싱 어 송- 싱 아웃 라우드- 모종의 이유로 자꾸 노래해야 하는 사정이 생기는 작가를 상상한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란들 거부할 도리가 있을까? 어느날 캐런 카펜터의 청아한 목소리가 노래하라고 명령한다면….

그런 음성이 들려온 적은 없지만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노래를 배우러 간다. 돈이 없을 때는 격주에 한 번으로 수업 일정을 조정해 가면서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취미다. 선생님은 소리샘으로서의 몸과 목을 새로이 감각할 수 있도록 풍부한 비유를 쓴다. 그의 말에 따라 나는 내 발성기관을 풍선으로도, 계단으로도, 밀가루 반죽으로도 여겨보는 연습을 한다. 목을 목이라고 생각하면 나오지 않는 소리가 있다. 서른두 살처럼 굴 때는 닿지 않고, 여섯 살처럼 굴어야지만 닿는 음이 있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 그 단어를 여러 소리로 발음해 보는 데는 방해가 된다. 지식과 경험이 소리를 그르친다. 그러므로 수업 시간 내내 나는 모르기 위해 힘을 쓴다. 나에 관해서든, 나의 몸에 관해서든, 안다는 생각을 부지런히 잊는다. 어릴 적에는 노래를 곧잘 했다는 사실도 잊어야 할 것의 목록에 든다. 한 번도 잘해본 적 없는 일을 배우는 마음보다 한 번쯤 잘해 본 적이 있는 일을 배우는 마음이 더 어지럽기 때문이다.

아이답게 성대가 튼튼했던 시절에는 하루의 반절을 노래하며 보냈다. 노래가 슴슴하다 싶으면 박자를 살짝 꼬집었다 놓는 담력이 있었고, 목소리를 크게 내고도 눈치를 보지 않았다. 남의 말씨와 목소리를 흉내 내는 놀이는 부끄러움보다 즐거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지금-여기의 내가 아니라 그때-거기의 사람으로 사는 시간이 좋았다. 살아본 시간의 몇 곱절은 되는 세월을 노래 속에서 보내고 돌아와도 현실에서는 5분 남짓한 시간만이 흘렀을 뿐이다. 내 몫이 아닌 삶을 훔쳐 살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야, 여러 노래를 부르며 여러 사람으로 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떤 날에는 스무 살 학생의 마음으로 선생님께 이런 편지를 쓴다.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크레용을 쥐는 법부터 향수를 뿌리는 법까지 가르쳐준 이에게’. 어떤 날에는 엄마를 여의고 별님과 달님의 나라로 간다. 가는 길에 아기 염소와 친구가 되고, 치자꽃 두 송이를 꺾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한다. 그가 끝내 나를 배신한다고 할지라도. 

한동안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노래를 부르며 쿠바에서도 살았다. 이브라힘 페레르의 목소리는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고단함’의 정수를 가르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많은 노래 중에서 내가 가장 자신있게 외우는 곡은 <Chan Chan>이었다. 도입부는 아직도 부를 수 있다. 댤토 쎄드로 보이 빠라 마까네, 레고 꾸에또 보이 빠라 마야리. 그리고 한 번 더. 댤토 쎄드로 보이 빠라 마까네, 레고 꾸에또 보이 빠라 마야리.뜻은 알 수 없어도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찾아오는 까닭 모를 피로감이 좋았다.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 가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알토 세드로에서 마르카네로 가네, 쿠에토에 도착해서 마야리로 가네.
알토 세드로에서 마르카네로 가네, 쿠에토에 도착해서 마야리로 가네.

시간이 흘러 내가 된 것은 나 한 명이다. 꽃 피고 뻐꾹새 우는 마을에서의 삶을 나는 모른다. 내 연인의 이름은 미셸도 찬찬도 아니다. 마르카네에도, 마야리에도 갈 일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그 모든 것에 관해 쓴 노래를 부른다. 목 놓아 불러도 어떤 사람은 오지 않는다. 거듭 노래해도 어떤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른다고 다 온다면 버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노래가 맘처럼 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을 잊어버리고서 내 목소리를 매주 새로 배운다. 내게 ‘Sing a song.’이라고 속삭이는 유일한 목소리에 대해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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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오지은의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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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평소 뭘 보고 듣고 읽을까?
언젠가 영감의 원천이 될지도 모를, 작가들의 요즘 보는 콘텐츠.


드라마 <TED LASSO> 포스터


드라마 <테드 래소>

애플TV


대학 미식축구 감독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팀의 감독이 된다는 황당한 코미디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았다. 뭐 좀 감동적이고 좀 웃기겠지…싶었는데 에미상 후보에 20군데나 올랐다는 뉴스를 보고 얄팍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예상한 대로 감동적이고 웃겼다. 생각해 보니 감동적이면서 웃길 수 있는 작품이 세상에 몇이나 되나 싶었다. 그래서 에미상이 그렇게 퍼줬구나… “사람은 믿어주는 대로 성장합니다”라는 대사에 눈물이 나서 부끄러웠다.



yoga with adriene 유튜브 캡처 


<요가 위드 에이드리언>

유튜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은 희귀한 존재다. 그런데 그 사람이 굉장한 요가 지도자라면…! 그와중에 옆에 귀여운 강아지까지 같이 있다면…! 그 채널이 바로 요가 위드 에이드리언이다. 나는 어깨가 결릴 때 유튜브 검색창에 ‘숄더 에이드리언’이라고 넣고 허리가 아플 때는 ‘백 페인 에이드리언’이라고 넣는다. 에이드리언 선생님이 워낙 긴 시간 성실하게 아카이빙을 해두어 무슨 증상을 치던 뒤에 에이드리언을 넣으면 적절한 영상이 나온다. 아까도 말했지만, 귀여운 강아지 벤지도 종종 함께 나오기 때문에 몸도 좋아지고 마음도 좋아진다.



소스뮤직 홈페이지


르세라핌 멤버들의 직캠

유튜브


재능이 넘치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며 생명력을 뿜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이돌 무대의 미학이고 르세라핌은 완벽하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 르세라핌의 전체 무대는 당연히 몹시 멋있지만, 직캠 또한 놓칠 수 없다. 완벽 너머의 인간미까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허윤진 씨의 경우 치명적으로 무대를 하다가 뒤에서 빙구같은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장면이 종종 있기에 강력히 추천한다.




음반 [Sling (슬링)]

Clairo(클레어오)


98년생 여자 뮤지션을 좋아하고 싶었다. 81년생으로서 그러고 싶었다. 눈밭을 배경으로 강아지의 커다란 발에 볼을 대고 있는 클레어오의 앨범 자켓을 보고 음악을 재생했을 때, 한 사람의 잘 짜여진 아름다운 세계를 듣는 기쁨을 느끼며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존경의 마음 또한 기뻤다. 재작년, 작년 2년간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 

파리 리뷰 외 저 | 다른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뷰 읽기가 더욱 재미있어진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죠. 어떻게 버틴 거죠. 이 미로를 어떻게 빠져나가고 있죠. 절실하게 궁금하다. 지금까지 읽었던 인터뷰 책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문학잡지 파리리뷰에서 만든 『작가란 무엇인가』시리즈다. 깊은 대화라서 그런지 읽을 때마다 마음에 들어오는 부분이 다르다. 모든 작가의 인터뷰가 재미있지만 3권에는 앨리스 먼로와 어슐러 K. 르 귄의 인터뷰가 있어 더욱 소중하다.


작가란 무엇인가 세트
작가란 무엇인가 세트
파리 리뷰 등저 | 김율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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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 계절을 통과하며 상처를 다루는 방식을 찾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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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 겪은 문맹의 시간을 거쳐, 두 언어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글을 써 내려가는 신유진 작가의 새로운 산문집 『상처 없는 계절』은 성실히 읽고 쓰는 삶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람들, 자연과 함께하는 현재를 보여준다. 타인을 세심히 살피는 시선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돌보게 되는 글쓰기의 놀라운 경험을 고백하는 작가는, 누군가에게로 보낸 말을 기꺼이 다시 맞이하면서 ‘나’와 ‘당신’을 순환하는 글을 이어간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더듬더듬 나아간 그의 문장들을 읽으며 치유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간단한 책 소개와 출간에 대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상처 없는 계절』은 읽고 쓰고 옮기는 삶을 통해 상처를 다루는 방식을 찾아나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책이 출간될 때마다 긴장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먼저인 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제가 쓰는 삶을 산다는 게 믿어지지 않거든요.

제목 ‘상처 없는 계절’은 굴곡 없이 순탄한 삶이라기보다는 많은 상처를 겪어낸 사람의 오늘, 더 이상 상처가 아니게 된 순간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로 책에는 상처의 기억들이 자주 등장하죠. 인종차별과 가난, 홀로 견뎌야 했던 고독한 시기들이 그러한데요. 그 시간들을 마주하고 있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기억을 글로 환원하는 과정이 작가님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지 궁금합니다.

굴곡 없는 삶이 있을까 싶어요. 모두 그렇듯이 저 역시 상처를 주고받고 만들며 살아왔는데요. 저에게는 상처를 받는다는 표현보다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아요.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일도 상처로 만든 게 아닌가 할 때가 많거든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상처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상처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건 무뎌지는 것과는 조금 다르죠. 기억을 쓰면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을 다시 살아볼 수 있고, 다시 살아보고 나면 조금은 다른 내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렇게 상처를 무늬로 만드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 같아요. 저는 표백된 하얀 세상이 아니라 무늬 가득한 세상을 만들며 살고 싶어요.

첫 번째 글 「언젠가의 봄」에는 ‘기공’을 배웠던 일화가 있어요. “내 안에 깊은 굴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갔던” 시절의 일이죠. 기공을 통해 그 굴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요. 요즘 새롭게 관심을 두게 된 취미나 일들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저의 유일한 취미는 산책이에요. 새벽에 반려인과 반려견과 함께 해 뜨는 것을 보는 게 하루의 위안이고요.

「어둠 속에 있다」 글에서 “글쓰기가 문장을 무덤 속에 파묻으며 언젠가 그것이 집이 되기를 희망하는 일이라면, 번역은 누군가 단단하게 세운 집을 부서뜨리고 그것의 잔해를 옮겨 와 재건하는 일”이라고 글쓰기와 번역을 구분해 정리해주셨는데요. 반대로 글쓰기와 번역이 맞닿은 지점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추가로, 각각의 작업 스타일도 알고 싶어요.

글쓰기와 번역이 맞닿은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죠. 그것을 정확히 알고 옮기고 쓰는 이들의 번역과 글은 늘 동경의 대상이고요. 지금 저는 그게 무엇인지 막연히 알고 있을 뿐, 아직 언어화가 되지 않아요. 경험과 노력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확실한 것은 번역도 글쓰기도 고강도의 노동이라는 것이죠. 엉덩이 힘으로 쓰고 옮긴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주로 새벽에 글을 써요. 일어나면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바로 쓰기 시작하죠. 망설이는 시간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해요. 생각이 많아지고 망설임이 길어지면 직관을 잃어요. 저에게 직관은 중요한 요소거든요. 일단 쓰고, 반복해서 읽고 고쳐요. 퇴고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이죠.

번역 작업은 주로 오후나 저녁에 하는데, 하루에 해야 할 분량을 정해놓고 해요. 번역할 때는 작가의 영상이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표정이나 목소리를 반복해서 보고 듣죠. 작가의 말투나 호흡 방식을 흉내 내며 글을 읽어보기도 하고요. 그게 저에게는 도움이 되더라고요. 일단 문장의 음악이나 리듬을 상상해볼 수 있고, 또 그 작가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면 재미있으니까요.

반려인과 운영하고 있는 카페 ‘르 물랑’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카페 안에 작업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고요. 카페는 어떻게 해서 시작된 건가요?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하시는지도 궁금해요.

반려인은 아홉 살 때부터 연극을 했어요. 한국에 올 때만 해도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외국인 학교에서 연극 수업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모두 취소됐어요. 일을 조금씩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연극인, 번역가, 작가. 이 직업들을 다르게 표현하면 비정규직이죠. 언제부턴가 고정적인 일이 없다는 게 자유보다는 불안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대화를 나눴죠. 우리가 그리는 미래에는 늘 어떤 ‘공간’이 있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싶은 일들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요. ‘르 물랑’은 카페이긴 하지만, 독서 모임도 하고, 공연도 하고, 북토크도 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희곡 낭독회, 연주회 계획도 있고요. 저희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곳에 하나씩 담아가려고 합니다.

책 속에서 작가님 주변을 둘러싼 타자들과 나누는 특별한 말들이 인상 깊었어요. 반려인과는 ‘사랑사랑’ 부는 봄바람이, 반려견 이안이와는 ‘안 돼’가 있죠. 요즘 새로 생긴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반려인은 카페를 하면서 한국어 실력이 부쩍 늘었어요. 요즘은 자꾸 아재 개그를 시도해요. 아재 개그는 세계 공용인 거 아세요?

이안이는 청년 강아지가 됐어요. 그래서 이제는 자꾸 저를 지키려고 해요. 얼마 전에 몸이 조금 안 좋았는데, 이안이가 침대 옆에 앉아 저를 지키더라고요. 이안이는 저에게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가르쳐줘요. 너무도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죠.

이번 책에는 유독 읽는 이를 적극적으로 떠올리는 글들이 많은 것 같아요. 책머리에 글 「계절 인사」에서는 ‘거기’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기도 했죠. 책을 쓰면서 어떤 독자를 상상하곤 했는지 궁금하고요. 마지막으로 『상처 없는 계절』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어요. 그래서 이제 저에게 독자는 구체적인 얼굴이고, 표정이고, 몸짓이죠. 예전에는 같은 계절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만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서로 다른 계절을 살고 있어도 만날 수 있죠. 내가 건너온 계절의 기억으로, 내가 가닿고 싶은 계절의 희망으로.

제 책을 읽어주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이것뿐이에요.

고맙습니다. 자주 기쁘고, 늘 평안하시길.



*신유진

작가이자 번역가. 파리 8대학에서 연극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옮긴 책으로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 『남자의 자리』 『세월』 『사진의 용도』 『진정한 장소』,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 마티외 랭동의 『에르베리노』,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소프루』와 엮고 옮긴 프랑스 근현대 산문선 『가만히, 걷는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생텍쥐페리의 문장들』이 있으며,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 카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 소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를 지었다.


상처 없는 계절
상처 없는 계절
신유진 저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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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을 긁어내 그리는 따뜻한 여덟 빛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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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STUDIO SEOUL


제10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2022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되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 이선진의 첫 소설집 『밤의 반만이라도』가 출간되었다. 반전(半全)의 이야기로 온전한 마음을 전하는 이선진 작가를 만나보자.



『밤의 반만이라도』는 작가님의 첫 소설집이죠. 언제나 ‘처음’은 특별하게 취급되는데요. 그렇다면 『밤의 반만이라도』는 작가님께 어떤 의미일지요? 그리고 이번 소설집을 묶으면서 가장 고민했던 점이 있으시다면요?

제게 이 책은, 책이라는 물성을 통해 처음 마주하게 된 독자분들께 건네는 안부 인사면서, 20대의 제가 지새웠던 수많은 밤에 대한 작별 인사 같아요. 제 소설 속 인물과 그 인물들이 겪은 사건들은 모두 허구이고 사실이 아니지만, 그 안에 담긴, 저를 통과해서 제 손끝으로 흘러나간 그 마음만큼은 진실하려고 무척 애썼던 기억이 나네요.

‘진실하려고 애썼다’는 작가님의 말씀을 들으니 떠오르는 질문이 있어요. 『밤의 반만이라도』 속 인물들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날것의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는데요. 그래서 인물들의 감정이 더 솔직하고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뜻 이해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입체적인 인물들을 통해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한 갈래가 아니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할 수 있고, 옆을 지키고 싶지만 떠나고 싶고. 사람이라면 모두 그런 양가적인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밤의 반만이라도』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마음도 모두 그런 복잡성을 띠고 있는데요. 그런 인물을 통해 독자분들이 어떤 명징하고 똑 떨어지는 이해에 도달하기보다는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감정은 뭘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되면 좋겠습니다.

『밤의 반만이라도』에는 ‘겨울’과 ‘밤’이라는 두 키워드가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작가님에게 두 단어는 어떤 의미일까요?

너무 춥기 때문에 누군가와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게 겨울이라는 계절이고, 너무 어둡기 때문에 빛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게 밤이라는 시간인 것 같아요. 그래서 겨울과 밤, 특히 겨울밤은 가장 춥고 어둡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때가 아닐까 싶네요.

결국 작가님의 ‘겨울’과 ‘밤’은 ‘사랑’에 맞닿아 있는 의미 같습니다. 『밤의 반만이라도』 속 인물들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사랑을 한다는 건 거울을 들여다보는 행위와 다름없는 것 같아요. 거울이라는 건 나와 무관한 대상에 상이 맺히고, 내가 대상에게 던진 시선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오게끔 하는 사물이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람은 늘 상대에게 가닿고, 상대와 깊이 연루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건 사실 자기 자신에게 가닿고, 자기 자신에게 더 깊이 연루되려는 마음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제 소설 속 인물들이 연인에게 모나게 굴면서도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거울 앞에 선처럼 스스로의 마음을 골똘히 들여다보기 위해서이고요.

또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인데요. 작가님 소설을 보면 대부분이 ‘인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더라고요. 작가님께 ‘인천’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일단 인천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에요. 무엇보다 인천, 하면 지방보다는 번성했지만 서울보다는 쇠락한 듯한, 그 중간에 애매하게 걸쳐진 공간 이미지가 떠오르는데요. 제 소설도 늘 인물의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마음을 다루기 때문에 잘 포개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소설집을 묶으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랄까, 독자들은 모르는 비밀을 하나 알려주신다면요?

공교롭게도 앞쪽에 실린 세 편의 소설에 모두 인물의 이름이 들어가요. ‘부나’ ‘나니’ ‘보금’이 그러한데요. 소설에는 ‘B양’으로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보금’이 사람 이름이었어? 하고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보금의 자리」를 구상할 때부터 ‘보금’을 화자의 죽은 애인으로 상정해두었어요. 죽은 애인이 남긴 텅 빈 자리라는 의미를 제목에 간접적으로나마 담아내고 싶었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활동을 시작하신 지는 4년 차이지만, 이제 첫 소설집을 내신 거잖아요.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마감이 연달아 잡혀 있어서 당분간은 계속 소설에 푹 빠져 지내야 할 것 같아요. 거창한 계획이나 포부는 따로 없고, 지금과 다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할지언정 언제나 그랬듯 무사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미한 낙관을 품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늘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컸다면, 이제는 저와 제 소설을 조금 더 믿고 종이 위를 뚜벅뚜벅 모험해보려 합니다.



*이선진

1995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20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밤의 반만이라도
밤의 반만이라도
이선진 저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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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그러진 곰과 햄터의 데굴데굴 유쾌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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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그러졌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위로를 주는 삐뚤빼뚤하지만 다정한 곰! 망그러진 곰이 2탄으로 돌아왔다. 40만 인간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털 찐’ 귀여운 외모 덕도 있지만,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해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망그러졌어도 나는 나인 걸~” 하고 외치는 망그러진 곰은 사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망그러진 곰은 항상 손에 힘을 빼고 그려서인지, 그릴 때마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이 든다”며, 독자분들도 만화를 읽을 때 이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작가 유랑에게 『망그러진 만화 2』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생생한 답변을 듣기 위해, 특별히 ‘망그러진 곰’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망그러진 만화2』가 출간되었어요(짝짝짝). ‘망그러진 곰(이하 망곰)’과 ‘망그러진 햄터(햄터)’의 소감이 듣고 싶어요.

망곰: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두 권이나 나왔다니 신기해.

햄터: 신기해~

망곰: 인간 세상에는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을 텐데도 우리의 이야기를 즐겁게 봐줘서 고마워. 

햄터: 고마워~

망곰이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또 이름은 왜 ‘망그러진 곰’이 되었는지 궁금해요!

안 그래도 부모님께 나는 왜 다른 곰들과 다르게 생겼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글쎄 내가 사실은 곰이 아니라 감자라는 거야! 내가 감자라니. 굉장히 충격이었지. 그런데 사실은 부모님이 장난친 거였어…!

나는 곰이 맞지만, 아마 다른 곰들과는 다르게 꼬질꼬질 망그러진 외형을 가지고 있어서 ‘망그러진 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 같아.


망곰이와 햄터의 <첫 만남> 에피소드를 인상 깊게 봤어요. 두 친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너무나도 가슴 따뜻한 이야기더라고요. 망곰이는 어떤 곰인지, 망곰이가 직접 자신과 햄터를 소개해 준다면요? 

안녕? 나는 망그러진 곰이야. 한국의 울창숲 곰돌시 망글로 3번지에서 살고 있어(깊숙한 숲속에 살고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오기는 쉽지 않을 거야).

나의 매력 포인트를 소개하자면 용맹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 아주 카리스마 넘쳐 보이지. 외형은 다른 곰들보다 삐뚤빼뚤 찌그러져서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존재가 어디 있겠어? 노랗고 복슬한 털, 짧고 통통한 팔다리.. 이대로의 내 모습을 항상 사랑하고 있어!

햄터는 내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하얀 햄스터 친구야. 정말 작아서 가끔은 밟을까 봐 걱정되기도 해. 하지만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아주 용감하고 대담한 친구거든. 솔직한 성격으로 가끔 나를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친구들을 아끼는 귀여운 햄스터야.

혹시 주변 친구들에게 엄청 인기 많은 거 실감 나요? 인기 비결이 궁금해요!

내가 인기가 있다구? 잘 모르겠는데…. 내가 사는 곰돌시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어. 근데 괜찮아. 멋쟁이 곰은 인기 따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리고 친구와 가족들은 날 좋아해 주니까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굳이 내가 인기가 많은 이유를 꼽자면, 귀여워서는 절대 아닐 테고… 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나의 모습이 멋있기 때문이겠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이에요! 망곰이는 털 찐(?) 곰이라 추위를 타지 않나요? 겨울잠을 자지는 않는지도 궁금해요. 망곰이의 겨울나기 비법이 알려주세요~ 망그러진 식구들의 신년 계획도요.

맞아. 북슬북슬한 곰 털은 내 자랑거리 중 하나야. 두터운 털 덕분에 추위를 별로 안 타거든. 햄터가 나의 털을 엄청 부러워하고 좋아해. 부드럽고 따뜻해서 누워있으면 잠이 잘 온다나… 그래서 가끔 내 배 위에서 햄스터 친구들이 잠을 자고 가기도 해. 친구들도 나중에 내가 사는 곰돌시에 놀러 오면 재워 줄게. 



겨울에는 따뜻한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면서 만화책 보는게 최고 아니겠어? 그리고 맛있는 거 많이 먹기! 겨울 살을 많이 찌워 놔야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구..

겨울잠도 자긴 하지만… 봄 잠, 여름 잠, 가을 잠도 자. 내가 잠이 좀 많아..

올해는 친구들과 좀 더 많이 소통하고 싶어. 나 인터넷에 글 올리려고 타자 연습도 열심히 하고 있다. 가끔 오타가 나기도 하고, 맞춤법이 틀릴 수도 있지만 이해해 줘~! 

망곰이도 꿈꾸는 곰생(?)이 있나요? 첫 아르바이트 후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을 느낀 것 같던데,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

내 돈으로 떡볶이를 맘대로 사 먹을 수 있고, 멋진 옷도 사 입고, 친구와 부모님한테 가끔 맛있는 걸 사주고, 좋은 거 선물할 수 있는 어른! 상상만 해도 멋있어.  

『망그러진 만화2』는 전편을 향한 독자 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으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망그러져도 무한한 애정을 보내주시는 독자 분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친구들을 알고부터 나의 곰생이 바뀌었어! 세상살이가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유할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더라고. 친구들도 인간 세상에서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찾아와 줘. 앞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랑 소식들 많이 가져 올게. 항상 함께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유랑

이모티콘도 그리고, 만화도 그리고, 그리고 싶은 걸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그리며 사는 작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캐릭터 ‘망그러진 곰’, ‘망그러진 햄터’로 다양한 콘텐츠와 굿즈를 만들고 있다.

@yurang_official


망그러진 만화 2
망그러진 만화 2
유랑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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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들마치』, 범사의 비범함 - 유상훈 민음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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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은 공감을 확대하고, 개인적 운명의 경계를 넘어 경험을 증폭하며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대한다.” _조지 엘리엇

내 앞에 책이 놓여 있다. 그 분량은 무려 1400쪽에 이른다. 마치 독자의 접근을 단호히 거부하는 듯한, 일종의 두려움마저 자아내는 이 엄청난 두께의 책은, 바로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지만 도통 읽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토록 장대한 책에 이르는 길은 그 자체로 도전이고 모험이다. 나 역시 『미들마치』를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이같이 기나긴 소설은 쓴 작가와 그것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와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낸 편집자, 이들 모두에게 적잖은 경외심을 느꼈다. 요컨대 『미들마치』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조지 엘리엇,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작가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메리 앤 에번스이고, 굳이 남성 이름을 필명으로 내세운 경위 속에 작가의 모든 고난과 빅토리아 시대의 풍조와 그 밖의 여러 복잡다단한 사정이 다 담겨 있다. 일단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듯이, 조지 엘리엇이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했던 당시에는 ‘여성’으로서 작가 생활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수난의 역사를, 엘리엇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브론테 자매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그 전의 제인 오스틴도, 그 후의 버지니아 울프도 녹록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령 운 좋게 작가가 되었다 하더라도, 여성 ‘작가’라면 더 잔인하고 모욕적인 시련, 즉 ‘여성’ 작가라는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 엘리엇이 쓴, 어쩌면 가장 자조적인 글이라 할 수 있는 「여성 작가들의 어리석은 소설들(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이라는 비평만 보더라도, 그 스스로 무엇을 가장 경계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야심 찬 작가는, 결국 자신이 도모한 것 이상으로 해냈다. 요즘은 물론이거니와, 엘리엇이 살던 시대에도 소설은 이미 넘쳐 나고 있었다. 수천 가지의 이야기들이 세월 속에 잊히고 마모돼 가는 와중에도, 그의 작품은 남았다. 심지어 문학사에 한 획(“영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을 긋는, 결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위업을 이뤄낸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읽히고 있으니, 더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터다. 나는 이처럼 소름 끼칠 만큼 대단한 작품을 펼쳐 들면서,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놀랐다. ‘이게 이 소설의 전부인가?’ 한가득 넘쳐흐르는 찬사들, 압도적인 규모, 걸출한 작가의 대표작! 소설 제목에 붙은 ‘지방 생활의 고찰’이라는 부제부터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솔직히 토로하건대) 이토록 기대를 배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악명 높은 빅토리아 시대, 이미 예고돼 있듯이, 영국의 한 지방 도시(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미들마치)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가치관을 지닌 여성과 남성들—도러시아, 터시어스, 에드워드, 메리, 프레드 등 숱한 개성적인 인물들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한데 얽히고 설키며 자신들의 삶을 조형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일찍이 케이트 밀렛이 평했듯, “조지 엘리엇은 혁명적이지만, 『미들마치』의 인물들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라는 말이 얼마큼 납득될 정도로 이 장엄한 소설은 지극히 통속적인 피날레, 즉 결혼을 향해 내달린다. 

이게 이 소설의 전부인가? 겉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지거나 더러 경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처럼, 문학 역시 함부로 비약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이 작품의 ‘가치’를 제발 알아 달라고 거창하게 호소하고 싶진 않다.(나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 속으로 뛰어들기에 적당한 자리를 한 군데 알고 있다. 독서에 왕도는 없지만, 우리는 가끔 힘들여 읽어야 한다. 예컨대 『미들마치』의 경이로움은, 새로운 시대의 맹아를 한없이 평범하고 안온하고 별스럽지 않은 인물과 사건 속에 심어 놓았다는 데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시대에 붙들린 채 살아가는 지난날의 사람들을 쉽게 비웃곤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지극히 보수적인 결말(결혼)로 치닫는 『미들마치』역시 고루하게 여겨질 수 있다. 거듭 말하건대,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우리들도 지금 시대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을 초월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그 벽을 넘어서려는 무모한 시도 끝에, 작디작은 물꼬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미들마치』는 19세기 영국의 지방 도시를 병풍처럼 그려 내면서, 다채로운 인물들의 삶을 결혼으로 엮어 낸다. 이것은 이 작품의 표피이다. 하지만 그 심연에 자리한 온갖 결심과 선택과 고뇌와 회한 등은, 마치 현대를 선취한 듯 독자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1400쪽에 이르는 기나긴 이야기는 결말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닌, 장차 도래할 혁신적 인간상을 제시하는 매혹적인 선언에 가깝다. 미지의 영역으로 한 걸음 차분히 나아가는 층계참에 서 있는 조지 엘리엇과 『미들마치』는, 오늘날 독자에게 쉼 없이 더 나은 가능성을 찾아 나서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위대한 소설은 으레 읽는 이(더불어 작가 자신과 번역자와 편집자)를 고달프게 하는 법이다. 이 긴긴 여정을 완주하고 나면,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렸을 때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그사이 우리 사유에 든든한 근육이 새로 붙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필자 | 유상훈 편집자

민음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아니 에르노, 욘 포세 등의 작품을 편집했다.                              


미들마치 1
미들마치 1
조지 엘리엇 저 | 이미애 역
민음사
미들마치 2
미들마치 2
조지 엘리엇 저 | 이미애 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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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STORY] 청다색(靑茶色)의 울림, 윤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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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의 새로운 아트 커뮤니티 ARTiPIO가 들려주는 ART STORY.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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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이자 최근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작가로 지속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윤형근.

메가 갤러리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와 함께 현대미술 메카인 뉴욕, 유럽 예술의 중심 파리를 점령해 그 입지를 증명했죠. 뉴욕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는 본점인 뉴욕에서 1970~80년대 작품을 소개하며 선보인 2017년의 첫 전시를 시작으로 2020년 2번째 개인전을 개최했고, 2023년 1월에는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넘어가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 지점에서 3번째 개인전을 선보이며 윤형근을 소개합니다.


데이비드 즈워너 파리 지점 윤형근 개인전 설치 전경. January 7 – February 23, 2023. © Yun Seong-ryeol. Courtesy of David Zwirner and PKM Gallery.


파리 전시 오픈 당일에는 무려 1,000여 명이 방문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요. 유럽에서 선보인 윤형근의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프랑스 파리뿐 아니라, 이탈리아 베니스에서도 그의 작품은 빛났는데요. 2018년 MMCA(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되어 성황리에 마쳤던 회고전<윤형근>이 2019년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열린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죠. 회고전 <윤형근>은 베니스의 시립 미술관인 포르투니 미술관(Fortuny Museum)을 가득 채우며 2019년 5월 11일부터 11월 24까지 진행되었는데요.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포르투니미술관에서 열린 윤형근 회고전 전경. ©Laziz Hamani


해당 전시는 세계적인 미술 전문지인 <프리즈(Frieze)>,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비엔날레 외부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로 주목받는 영광을 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방문했던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호평을 쏟아내기도 했죠.

이탈리아의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에서는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영향력 있는 미술인이자, 이탈리아의 원로 평론가 프란체스코 보나미(Francesco Bonami)가 윤형근을 주목하며 리뷰를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답니다.


윤형근, Burnt Umber, 1980 © Yun Seong-ryeol. Courtesy of David Zwirner and PKM Gallery.


윤형근의 작품을 살펴보면 ‘오묘한 검은색’을 풍기며 큰 붓으로 푹 찍어 내려 그은 듯,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오랜 시간 세파를 견뎌낸 고목(古木)과도 닮아 있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흙의 정취를 전하는 듯한 그의 작품은 담담하면서도 서정적인 편안함을 전해옵니다.

이처럼 수수하고 겸손한 ‘미덕’을 추구하는 한국 전통 미학현대적 회화 언어로 풀어낸 윤형근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989년 서울 서교동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앉아 있는 윤형근 작가의 생전 모습 © David Zwirner


윤형근의 대표 시리즈인 <천지문(天地門)>동양의 미를 담고 있어 작고한 이후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의 서화에 근간을 두고 화풍을 정립한 그의 작업은 작위적인 모습 없이 기교가 배제되어, 고매한 인격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 여겼던 옛 선비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BLUE는 하늘이요, 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天地)라 했고, 구도(構圖)는 문(問)이다.”

- 윤형근 -


<천지문> 시리즈를 설명할 때는 ‘청다색 (靑茶色)’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작가는 극도의 단순함을 위해 하늘을 뜻하는 ‘청색(Ultra-marine)’과 흙의 빛깔인 ‘다색(Umber)’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청다색을 통해 린넨, 캔버스, 한지 위에 자연스럽게 스미고 배어 나오도록 연출합니다.

이로 인해 청다색으로 세워 올린 천지문(天地門) 기둥은 마치 먹을 연상시키는 동양적인 정신과 색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을 받고 있죠.


1981년 프랑스 파리의 윤형근 화백 작업실 © Yun Seong-ryeol. Courtesy of PKM Gallery.


2023년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된 개인전은 보다 그 의미가 깊습니다.

윤형근은 일제강점기부터 굵직하고도 치열한 정치·사회 변혁기를 몸소 겪으며 파생된 고민을 작품에 녹여냈는데요. 당시 한국 군부 정치에 대한 분노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화업을 이루고자 체류했던 파리에서 제작된 작품을 중점적으로 전시했습니다.

전시된 25점의 작품은 대부분 첫 공개가 되어 1979년부터 1984년까지의 체류 기간동안 윤형근 작업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 그림이 1973년부터 확 달라졌다.

서대문 교도소에서 나와 홧김에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전에는 색을 썼었는데 색채가 싫어졌고 화려한 것이 싫어

그림이 검어진 것이고, 욕을 하면서 독기를 뿜어낸 것이고, 그림에 살아온 것이 배인 것이다."

- 윤형근 일기 중에서 –


그의 작품은 동양화에서 쓰이는 *발묵 *선염 효과를 활용해 한국적인 회화 기법을 선보입니다. 이렇듯 윤형근만의 고유한 방식과 작품세계를 관철시키고 있으나, 시기에 따라 미묘한 특징이 보입니다. 특히 쉽게 접하기 어려운 70년대 후반부터 80년 초반까지의 작품은 더욱 소중한데요.

특히 윤형근의 파리 체류 시기는 그가 다룬 소재 중, 특히 ‘한지(韓紙)’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특히 한지 작업에 보다 주력했기에 다른 작품들보다도 ‘번짐’을 눈여겨볼 수 있는데요. 이는 장인이자, 예술적 스승이었던 김환기의 한지 작품에서안료가 한지에 스미고 번지는 부분에서 영감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던 당시 상황 속에서 벗어나 제작된 작품들은 전 세계 관람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발묵 : 먹물이 번지어 퍼지게 하는 산수화법
*선염 : 원단(캔버스)을 만들기 전에 원사(실)를 염색해서 제작하는 방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Yun Hyong-keun. Burnt Umber & Ultramarine, 1981-1984. Oil on linen, 91.8 x 115.2 cm. Courtesy of Yun Seong-ryeol & PKM Gallery.


Yun Hyong-keun.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99, Oil on linen, 227.5 x 181.6 cm. Courtesy of PKM Gallery.


이후 1980년대에는 체류한 이후 프랑스 미술계에서 나름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색의 사용이 보다 투명해지고 현대적인 시도가 가미됩니다. 특히 그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국민들의 희생에 대한 착잡함을 작품에 풀어냅니다. 점차 여백이 사라지고 점차 간결해지죠. 작품에 묻어난 간결함과 절제된 선, 면들은 마치 무언의 침묵과도 같이 그 무게와묵직함이 전해집니다.

1990년대의 작품은 보다 순도 높은 검은색을 주로 사용하며, 미묘한 농담 차도 잘 보이지 않고, 오일의 비율이 줄어들며 건조한 화면으로 구성합니다. 이는 되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오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Yun Hyong-keun Portrait, 1980 ⓒYun Seong-ryeol. Courtesy of PKM Gallery


이후 1973년 이후부터의 작업은 큰 변화 없이 전개되지만, 캔버스 위 묵직하게 올리는 붓터치는 각기 다른 모습을 띕니다. 물감과 오일의 비율, 천의 컬러감, 면직 직조 두께, 건조 시간등 모든 면에서 매일같이 변화합니다. 더불어 시대별 작품마다 당시 시대 배경의 아픔에서 비롯된 작가만의 의지와 감정을 엿볼 수 있죠.

이처럼 윤형근은 타계했을지라도 그의 작품은 당시 작가의 감정을 고이 간직한 채, 전 세계 곳곳에서 묵묵히 숭고한 울림을 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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